주민에 돈 꿔주고 식량 사들인 돈주 부부, 공개재판 받은 사연

[북한 비화] 국가 식량 판매 1개월만에 중단되자 주민들 "무모한 희생자만 생겼다" 비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21년 6월 17일 열린 노동당 제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 셋째날 본인의 서명이 담긴 ‘특별명령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북한의 셀프 국경봉쇄에 따른 식량난 여파가 평양에까지 미치던 지난해 7월 초 갑자기 평양시 락랑구역 세대들에는 전국적으로 국가 식량 판매사업이 이뤄진다는 인민위원회 회람이 돌았다. 앞서 6월 중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인민생활 안정을 위한 ‘특별명령서’에 직접 서명한 뒤 내려진 내각의 조치였다.

회람을 받아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국정 가격으로 식량을 공급할 것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에 기대감도 부풀었다. 그러나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국정 가격보다 비싸게 식량을 판매했다.

어찌 됐건 국가 식량 판매는 시작됐고,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2021년 9월 말 락랑구역 평양-원산 버스 주차장 공터에서는 공개재판이 진행됐다. 군중 심판대에 오른 대상은 돈이 없어 쌀을 사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몰래 돈을 꿔주고 구역 안의 여러 식량판매소에서 시장보다 싼값의 식량을 사들인 40대 후반의 돈주 부부였다.

이날 공개재판에서 구역 안전부장은 이 부부를 향해 “악성 전염병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을 단단히 봉쇄하고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하는 속에서 굶는 인민들이 없어야 한다시며 원수님께서 직접 군량미를 풀도록 은덕을 베푸셨는데 여기에 돈벌레처럼 사람들 속에 파고들어 자기 사리사욕과 탐욕을 채운 인간 추물들”이라고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가 군량미를 풀어 장마당 가격보다 눅은(싼) 값에 낟알을 공급해주고 있는 것을 악용해 식량 농간질을 한 자들이 준엄한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 구역 안의 모든 군중이 정신을 차리고 자각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공개재판 지도 성원으로 나온 평양시 안전국 간부도 “장마당 식량판매 가격이 치솟아 인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으신 원수님께서 ‘특별명령서’를 비준해 주셨는데, 이를 개인의 이윤 추구에 이용한 자들은 그가 누구이든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하고 평양시에서도 살 자격이 없다”며 합세했다.

시장보다 저렴한 가격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으로 최고지도자의 ‘애민’을 선전한 북한 당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돈벌이한 40대 돈주 부부를 시범으로 내세워 식량 사재기 현상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공개재판을 지켜본 락랑구역 주민들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돈 없는 주민들은 국가가 무상으로 공급해주거나 국정 가격으로 아주 싸게 식량을 판매하지 않는 한 별달리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돈 없는 주민들에게는 돈을 꿔줄 돈주들이 없어지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다가왔다.

실제 이 공개재판의 영향으로 락랑구역 돈주들은 일제히 그 누구에게도 돈을 꿔주지 않았다.

이후 이 상황을 전해 들은 서성구역의 돈주들은 “쌀 농간질을 못 하게 하면서도 돈이 없는 사람들이 쌀을 살 수 있도록 1인당 구매 정량을 정해놓으면 될 일이 아니냐”며 코웃음을 쳤다.실제 당시 서성구역에서는 인당 구매할 수 있는 양을 정해놨고, 돈주들이 돈을 꿔주는 것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식량 판매사업은 결국 군량미 부족에 1개월 만에 중단됐다. 군량미 실태를 모르고 내린 ‘특별명령서’는 한갓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게 당시 평양시민들의 말이었다. 특히 락랑구역에서는 애꿎은 돈주 부부만 비난을 받았다는 동정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주민들은 “당에서는 늘 당의 현명한 영도를 따르라고 하지만 현실성 없는 당정책 때문에 무모한 희생자만 생기는 것 아니냐”며 “이번 당정책은 실패한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그런 와중에 공개재판을 받은 돈주 부부가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촌 중에 추격기 비행사가 있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가족 중에 추격기 비행사가 있으면 경(輕)하게 처리하라는 국가 형벌 규정에 따라 안전국은 이 부부를 단순 교양 처리하기로 결론 내린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추격기 비행사 친척이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교화 10년은 갔을 것”이라며 신분과 집안에 따라 처벌을 달리하는 국가의 처사에 대한 주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