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유훈 관철’…희생물 된 어민과 가족들

[북한 비화] 인민군 15호 수산사업소에 내려진 '수산물 전투' 명령…애민 부각 위해 죽음 내몰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21년 12월 2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수도 평양시민들에게 수천t의 물고기를 보내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었다며 “위민헌신의 세계가 그대로 비껴있다”고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수령님(김일성)께서는 평양 시내 대학과 병원 시민들에게 사철 신선한 물고기를 먹이시려고 애쓰시었다.”
“장군님(김정일)의 유훈이자 마지막 친필문건이 평양 시민들에게 물고기를 매달 일정하게 공급하는 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집권 5년 차인 2016년 국방력 강화에 매진하던 김정은은 경제난이라는 내적인 위기 속에서 인민 생활도 소홀히 하지 않는 ‘애민’ 지도자로 거듭나야 했다. 이에 그는 위기 때마다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 관철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활용했다.

2016년 12월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의 유훈 관철이라는 명목 아래 평양 시민과 대학, 조선적십자종합병원, 평양산원, 김만유병원, 옥류아동병원, 평양시구급병원 등 평양 시내 병원들에 수천t의 질 좋은 물고기를 골라 공급했다.

하지만 이런 김정은의 애민 행보를 조명하면서 대대적인 물고기 공급을 업적으로 내세운 북한의 화려한 선전 뒤에는 인민군 수산사업소 어로공(어민)들과 그 가족들의 피눈물 나는 사연이 숨겨져 있다.

2016년 1월 인민군 15호 수산사업소에는 그해 평양 시민들과 평양의 대학, 병원들에 매월 정기적인 물고기 공급을 정상화해야 하는 이른바 ‘수산물 전투’ 계획이 내려졌다. 이에 15호 수산사업소는 각 선장에게 선원 선발과 수산물 생산량 등 1~3월 동절기 어로 활동 계획을 분담했다.

선장들과 선원들 그리고 가족들은 추운 겨울 어업 활동을 부추기는 북한의 무리한 물고기잡이 계획에 기가 막혔다. 동절기에는 어업 중 사고가 많이 발생해 선원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명령으로 하달된 계획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이에 따른 불만은 애꿎은 평양 시민들에게 향했다. 어민들과 그 가족들은 “평양사람들 때문에 동해 먼바다에 나가서 물고기 밥이 되게 생겼다”며 평양 시민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유훈 관철이라는 이름으로 애민 사상을 부각하려던 게 당시 북한의 계획이었지만, 무리한 어업 활동에 내몰린 어민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분노와 증오심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실제 그해 겨울 무리한 조업으로 인한 선박과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인민군 15호 수산사업소가 2016년 4월 초 국방성 후방총국 참모부에 올린 1/4분기 사업보고서 사건·사고 적시란에는 11척의 선박이 파손 수리 상가에 맡겨졌고, 6척의 선박과 30여 명의 인원이 실종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15호 수산사업소는 실종된 30여 명의 가족 측에 이들이 동해상에서 아사, 동사해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종 사망 통보를 받은 가족들은 겨울의 차디찬 바다에서 남편, 아버지가 얼마나 춥고 배고프다 죽어갔을까 안타까워하면서 통곡했다. 특히 실종된 어민의 아내들은 “평양사람들에게 물고기를 공급하라는 유훈 때문에 무리 과부가 된 게 아니냐”며 원통해했다.

당시 가족들에게는 당중앙위원회 집체 위로문과 인민군 국방성 후방총국에서 보낸 냉동 물고기 10kg, 콩 5kg이 전달됐다. 그러나 가족들은 고기잡이 나갔다 죽은 남편, 아버지의 목숨과 맞바꾼 이 음식들을 쳐다볼 수도 먹을 수도 없다며 내내 가슴 아파했다.

이토록 수많은 어민과 그 가족을 죽음과 고통에 몰아넣은 김정은 정권의 ‘애민’은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애민’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