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전격적으로 남북 간 통신선 복원 조치가 발표되었다. 뉴스를 처음 접하는 순간에 들었던 첫 느낌은 “어, 다소 이른데!” 였다. 발표 이후 다양한 분석과 전망이 지면과 방송을 장식했다. 통일부를 비롯한 정부와 여당은 환영을 넘어 흥분하는 기미마저 보였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해수부 공무원 총격·소각 살해사건, 대통령에 대한 막말비난 등 지난 410여 일 동안 있었던 일은 이미 저 먼 나라의 옛일이 되었고, 저마다 대북지원계획과 장미빛 미래만을 얘기했다. 일부 당국자는 한미합동군사훈련 연기론까지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후속보도(7.30)를 내놓았다. 조총련은 북한의 외곽단체이므로 북한당국의 공식입장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에 이번 논평은 합의 과정의 막전막후, 향후 전개방향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었다. 이틀 후에는 김여정이 직접 나서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 중지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8.1)했다. 치밀한 각본하에 문재인정부 길들이기와 남남갈등·한미이간을 노린 전방위적인 통일전선사업, 즉 정세 주도권 장악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북한의 발표 형식이다. 노동신문이나 중앙방송 등 내부매체가 아닌 조선중앙통신, 조선신보 등 대외매체를 활용해 합의 사실과 입장을 공개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북한이 이번 조치를 북한주민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대남 공작·대외 선전 공세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주민들에게는 8월 한미합동군사 훈련 축소(사실상 중단)· 식량 등 지원물자 수원 등과 같은 가시적 성과를 거양한 후 김정은 리더십의 결과, 애민·통일지도자로 선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알릴 듯하다. 지난해 북한 전역에서 진행된 대북전단 살포 규탄대회·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대대적인 쇼를 진행한 입장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남북관계 정상화를 알릴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최근 북한의 전술적 변화는 ‘선(先) 대남 선전·압박’을 통해 애가 닳도록 닳은 문재인 정부를 그들의 프레임(frame)으로 끌어들여 당면한 경제난·코로나 국면 타개, 그리고 비핵화·대북제재 관련 미국의 입장 변화를 유도해 나가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추정된다.
다음으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난시기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우리 측에 전가하면서 대통령이 몸소 나서 자주의 길로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방귀 뀐 놈이 더 화를 내는 전통적인 행태를 넘어 임기 말을 맞아 초조한 대통령을 정조준한 것이다. ▲ 특히 김여정이 8월한미합동군사훈련을 향후 남북관계 복원의 시금석이라고 규정한 것은 장단기 포석이 깔려 있는 고도의 전술이다. ▲또한 국내외 일각에서 이번 북한의 조치를 경제난 돌파구 차원에서 해설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도 아전인수식 억측이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점이다.
지금 북남관계의 회복을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통신련락선의 재가동을 북측의 《경제난》과 억지로 결부시켜 자의적인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이들은 2018년의 대화국면도 《대북제재의 산물》이라며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나머지 자주의 원칙을 견지하며 부당한 압력을 배격한 조선의 대화자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2021년 7월 30일, 조선신보)
우리 정부와 군대는 남조선 측이 8월에 또다시 적대적인 전쟁연습을 벌려놓는가 아니면 큰 용단을 내리겠는가에 대하여 예의 주시해 볼 것이다. 희망이냐 절망이냐? 선택은 우리가 하지 않는다.(2021.8월 1일,김여정 담화)
아무튼 최근 북한의 내부동향을 보면 올해초 8차 당대회에서 결정한 ‘핵+자력갱생의 정면돌파전 2.0’의 근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경제난 탈출구 모색, 코로나19 위협 예방, 미국과의 대화를 통한 대북제재 완화의 기반을 마련해 놓을수 있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조치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북한이 그간의 문재인정부 무시 전술에 변화를 주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난 6월 중순 당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친필서명한 후 북한주민들에게 공개한 특별명령서(비축 군량미 방출 승인 추정)가 이행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추정된다.
6월 말 당전원회의가 끝난 지 채 보름도 안 되어 당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리병철, 박정천, 김정관 등 군수뇌부를 일제히 문책(6.29)한 것은 일대 사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한 달여의 진단과 조치를 거쳤고, 며칠 전 정권수립이래 최초로 군지휘관 및 정치지도원 강습회(7.24~27)까지 소집하는 등 내부 단도리를 끝냈다. 이처럼 일단 숨을 돌린 김정은이 이제는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포함한 남북 및 미북 관계 국면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 선제적으로 통신선 복원이라는 전술적 행보를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전략전술은 이처럼 명확하다. 이런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혹시라도 이미 현정부가 물밑협상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간의 남북 및 미북관계 교착 국면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앞으로는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더욱 충실하겠다고 언약하는, 일종의 약속어음을 발행해 주었다거나 향후 협상국면에서 이런 시그널을 보이면 이건 큰 실수를 넘어 역사앞에 죄를 짓는 일이다.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 대폭 축소와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압박, 남북합의서 국회 비준과 국가보안법 폐지, 식량 및 백신지원 계획 등은 일시적으로 남북관계에 햇빛을 줄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초대형 태풍으로 변해 우리나라를 휩쓸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해부터 김정은이 핵·미사일 개발에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사회주의 계획경제 복원과 비사회주의 척결 실험이 어느 정도 끝나면 대남통일전선 사업으로 방점을 옮길 것으로 전망(北의 ‘Again 2018’ 통일전선전술 경계해야/2020.12.9 데일리NK 곽길섭 북한정론 등) 해오고 있다. 얼마전 출간한 『김정은과 바이든의 핵시계』(부제: 알기 쉽게 풀어쓴 ‘자유 대한민국’ 전략노트/2021.7.15 곽길섭 저)에서도 아래와 같이 전망을 했다.
앞서 얘기한 대로 북한이 바이든 정부와의 직거래(통미봉남通美封南)를 당장 트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북한은 지금은 미국과의 기싸움과 큰 판에서의 승리를 위해 문재인 정부를 무시하고 있지만, 금명간 2018년처럼 또다시 한국 정부를 원 포인트로 활용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2021년 하반기는 임기 마지막 해를 맞이한 문재인 정부가 남북 교류협력 재개를 통한 가시적 성과 창출에 목을 매고 있는 데다가 20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이 본격화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호기다.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노를 젓지 않고 그냥 지나치긴 너무 아쉬운 골든타임이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문재인 정부를 조롱과 막말, 도발로 완전히 길들여 놓았으니 언제든지 손만 내밀면 된다.(179쪽)
기업의 분식회계(window dressing settlement)는 범죄다. 비핵화와 관련된 분식합의는 더 큰 범죄이고, 나라를 통째로 팔아먹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국민들도 정부의 어설픈 합의를 묵인하거나 이에 편승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러한 행위는 합의를 밥 먹듯이 파기하는 김정은에게 영양제를 수혈해 주는 격이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북한이나 주변국에게 그냥 내맡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포괄적 로드맵에 기초한 완전한 비핵화 합의가 도출될 수 있도록 미국과 철저히 공조해 나가야 한다. 북한의 단계적, 동시적 해법과의 접점을 어느 정도는 모색하더라도, ‘선 핵동결·비핵화 로드맵’ 합의는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북한이 비핵화를 계속거부할 경우에 대비한 플랜B도 반드시 검토·준비 해나가야 한다.(207쪽)
향후 김정은은 서두르지 않고 정부의 8월 한미합동군사 훈련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조치 결과를 본후 다음 수순을 정할 것이다. 대화와 도발, 모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도 인도적 지원, 대화 재개에만 목메여서는 안 된다. 급하면 진다. 특히 한미합동군사훈련은 국가의 명운이 걸린 안보자주권의 문제이고, 혈맹이자 가치동맹인 미국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최고의 협력틀이다. 새집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 살고 있는 자기집의 서까래를 먼저 빼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지난 10년의 김정은의 통치행태를 분석해 보면, 장단기 계획(공작)이 다 있다. 그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지원 제의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특히 통신선 복원 조치(7.27)을 앞두고 군 내부와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단도리 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북한은 “하나를 주면 열을 더 달라하고, 열을 주면 백을 달라”고 하는 게 기본적인 행태다. 게다가 이제 핵개발을 거의 마쳤다. 현정부가 바라듯이 고분고분할 상대가 아니다. 작은 과자봉지가 아니라 아예 공장을 달라고 할 수 있다. 국가안보를 협상과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남북 간 대화와 교류협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추진해야 한다. 그렇지만 ▲당당해야 하고, ▲과정이 투명해야 하고,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해야 한다. 앞으로 1~2년이 자유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뿐아니라, 평화·통일 문제는 특정정권을 넘은 장기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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