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이 마무리되고 있다.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큼 고향을 찾는 사람들로 붐비던 모습을 올해는 다소 보기 어려웠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고향 방문을 자제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지척에 두고도 고향에 갈 수 없는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문득 명절 때마다 북녘 고향을 그리던 실향민과 탈북민들이 생각난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안타까워하던 수많은 분단의 사람들 말이다. 명절 때마다 임진각 망향정에 올라 멀리서라도 고향 땅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던 애타는 마음들이 전해진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그들에 대한 마음의 거리를 아주 조금이나마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
70여 년의 분단 세월 동안 남북한은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추석날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다. 필자는 작년 추석을 북중국경에서 지냈다. 평소 자주 오가며 눈여겨 보던 지역에 산소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추석날 북한 주민들은 성묘하러 그 산소를 찾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출장길에 올랐다. 추석날 이른 새벽부터 중국 쪽 산에 올라가 그곳을 지켜봤다. 카메라를 숨긴 채 숲속에서 기다린 지 한 시간여쯤 지났을까.
마을 어귀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족히 수백 명의 사람이 무리 지어 저마다 향한 곳은 바로 그 산소였다. 차례상에 놓일 음식을 머리에 이고 진 채 고갯마루를 올랐다. 트럭 짐칸에 탄 사람들은 하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느릿느릿 비포장 길을 달리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보였지만 대부분 걸어서 산소로 향했다. 산소 주변을 벌초하며 차례를 준비하는 추석날 아침풍경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서는 저곳이 남북한 중 어디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단 70년의 세월은 결국 명절을 지내는 방법에서 차이를 만들었다. 산소 앞에 선 그들을 한참 지켜보면서 남북한 차례 풍습이 몇 가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첫째, 절을 하는 횟수다. 남한은 절을 두 번 하는 반면 북한은 세 번 절을 했다. 차례를 지낼 때 왜 세 번 절을 하는지 탈북민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풍습인데 왜 세 번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하기야 만약 남한 출신 사람들에게 왜 절을 두 번 하느냐 물어보면 똑같은 대답일 것이다. 지금까지 대대로 전해왔다는 거 외에 달리 할 말이 있을까? 절을 하는 횟수가 무어 그리 대수냐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민족 한 핏줄이라던 우리가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풍습에서 차이가 난다는 건 쉬이 볼 문제는 아니다. 나중에 통일되어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차례를 지낼 때는 절을 두 번 해야 할까 아니면 세 번 해야 할까?
둘째, 지금이야 많이 순화되었다지만 남한에서 차례는 남성들의 영역이다. 차례를 지낼 때 여성이 함께 절을 하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그저 여성은 부엌 한켠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뒷일을 도맡아 하는 정도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의 차례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모두 함께 산소에 절을 올렸다.
셋째, 산소가 여러 개일 경우 차례를 지낼 때 재수 음식을 재사용하는 경우다. 남한에서는 산소마다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 간다. 한번 차례를 지낸 음식은 다른 산소에 가져가 재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한 산소에서 차례를 지내고, 바로 옆 산소에 음식을 그대로 옮겨가서 재사용했다. 물론 필자가 지켜본 그 가족만의 특이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남북한의 차례 풍습이 달라졌다는 건 통일 이후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차이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민족의 풍습마저 달라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분단의 골이 깊어짐을 의미한다.
차례를 지낸 후 오순도순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은 남이나 북이나 같았다.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남북한이 바로 지금의 우리다. 통일의 길은 요원하고 각기 다른 두 체제의 평화로운 공존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다름에 대한 인정이 결코 북한의 독재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가족들이다. 그들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추석날 아침, 힘겹게 고갯마루를 오르던 분단의 사람들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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