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문제, 뭐가 합의됐나?”

23일 발표된 공동보도문에 담겨진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 결과를 가지고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자화자찬이 시작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23일 남북 쌍방의 회담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난 자리에서 “이번 손님들은 자질구레한 문제는 안 따지고 회담에서 시원스럽게 해 주었다”고 치하했다는 소식이다.

지난번 정동영(鄭東泳) 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일(金正日)을 만난 뒤 북측이 하는 모든 일이, 노무현 정권의 사람들의 눈에는, 예외 없이 “시원시원”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의 결과는 눈을 씻고 잘 드려다 보면 “시원시원”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이번 남북장관급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속셈은 웬만큼 물정을 가릴 줄 아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간파하기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첫 번째 속셈은 물론 남한의 노무현 정권을 ‘볼모’로 잡아서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의 북핵 문제에 관한 압박외교의 예봉을 둔화시키고 이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속셈은 이미 이번 회담 성사의 대가로 챙긴 비료 20만 톤에 더하여 30만 톤의 추가비료와 40만 톤의 쌀, 그리고 농기구들을 남측으로부터 챙겨가기 위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번 회담 결과를 담은 공동보도문의 내용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은 핵문제가 한 개의 독립 항목으로 취급되어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하여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실질적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이것을 합의라고 이룩한 것인가.

북핵문제와 조선반도 핵문제는 그 의미가 전혀 달라

만약 정동영 통일부장관을 비롯하여 남측 대표들이 아무 물정을 모르는 청맹과니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꼭두각시가 아닐 수 없어 보인다.

우선 핵문제에 관한 이 합의 대목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핵문제’를 가지고 얘기한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긴장을 가중시키고 있는 핵문제는 한 개의 핵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문제 삼고 있는 ‘핵문제’는 ‘북한의 핵문제’다. 즉, “북한이 개발하고 있는 핵무기 문제”다.

우리는 이것을 줄여서 ‘북핵 문제’라고 통상 얘기한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핵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핵문제’는 “우리(북한)로 하여금 자위를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말한다. 이것을 가리켜 북한은 ‘조선반도의 핵문제’라고 표현한다.

결국, 한 개가 아닌 두 개의 ‘핵문제’가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와 ‘조선반도의 핵문제’다. 이 두 개의 ‘핵문제’는 성격의 설정이 전혀 다른 상이한 문제기 때문에 그 해법도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소위 ‘평화적, 외교적 해결’을 추구하는 베이징 6자회담이 교착되어 있는 이유도 실제로는 바로 이 두 개의 ‘핵문제’가 한 개의 ‘핵문제’로 정리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문제를 가지고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데 있는 것이다.

이번 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에서는 “핵문제 해결”을 운운하고 있다. 문제는 어느 ‘핵문제’냐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보도문의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결국 이번 회담에서 남북이 얘기하고 있는 ‘핵문제’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거론하는 ‘북핵 문제’라기보다는 북한이 얘기하는 ‘조선반도의 핵문제’의 차원에서 거론되는 ‘핵문제’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핵관련 합의 사항, 반미공조 부메랑 돼 되돌아 올 것

더구나 ‘실질적 조치’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기만적이다. 서로 상이한 ‘핵문제’를 가지고 대립되어 있는 마당에 도대체 어떠한 ‘실질적 조치’가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이 표현이 갖는 의미는 그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실제로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는 ‘실질적 조치’가 마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비추어지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남북 쌍방이 그러한 ‘실질적 조치’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실질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책임은 다른 쪽, 즉 미국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또 믿게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남한에서, 특히 청소년들 사이를 ‘반미정서’ 더욱 조장ㆍ심화시키는 계기로 활용한다는 북한 특유의 고도의 ‘선전ㆍ선동’ 기법에 남쪽의 노무현 정권이 둘러리를 서 주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번 공동보도문의 핵문제에 관한 대목은 “한반도의 비핵화가 북한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북한 측의 기만적 ‘선전’을 사람들로 하여금 순진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뉴앙스를 담고 있다. 이것은 머리가 제대로 되어 있기만 하다면 삼척동자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일이다.

지금 북한은 어떻게 해서든지 ‘핵보유국’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획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북한이 왜 그렇게 하는가. 그 이유도 웬만큼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국제사회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북한의 다음 수순은 자명해 진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핵보유국’은 북한뿐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워 미국과 국제사회의 “북한 핵 포기” 요구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은 물론 인도, 파키스탄과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도 핵보유국인데 어째서 유독 북한에게만 핵 포기를 요구하느냐”고 항변하면서 북한의 핵 포기 문제도 “이들 여러 핵보유국들의 핵 포기와 함께 국제적 핵군축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ㆍ생산을 저지하고 폐기시키는 문제는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은 핵무기를 포기함이 없이 북한의 핵 보유 여부에 관하여 북한판 NCND의 그늘 속에서 핵을 공갈카드로 이용하여 남한을 계속 북한의 포로로 관리하면서 김정일 독재체제의 연명에 필요한 외부지원을 계속 확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북측의 고분고분한 자세, 식량과 비료 지원 요청 때문

이렇게 볼 때 이번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의 결과는 가뜩이나 빈사(瀕死)의 지경에 와 있는 한미동맹에 또 하나의 결정타가 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특히 핵문제에 관한 장관급회담의 결과를 미국이 수용할 가능성이 전무해 보이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한국의 노무현 정권 사이에 점차 심화되고 있는 엇박자 행보는 결국 미국에게 한국과는 상의 없는 독자적 대북 정책 추진의 선택을 강요하게 되고 한미동맹 관계는 이제 복원력을 상실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노무현 정권은 이번 장관급회담은 앞으로 몇 갈래의 남북회담 스케줄에 합의하고 회담 장소로 ‘백두산’을 거론하며 8.15를 기해 아마도 1회성 이산가족 상봉과 되어보아야 된 줄 알게 될 화상 상봉 같은 것들에 관한 합의를 담아내는 한편 회담 석상에서도 과거와는 달리 서로 자극적인 언사나 표현들을 자제했다는 것을 크게 훤전(喧傳)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북측의 조심성이야 말로, 그리고 북측의 고분고분한 자세야 말로 그 이유가 분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난번 이번 장관급회담 개최를 수용하는 대가로 20만 톤의 비료에 추가하여 30만 톤의 추가 비료와 40만 톤의 식량을 남측으로부터 받아가고 거기에 더하여 핵문제에 관하여 남측의 노무현 정권을 볼모로 잡고 있기 위해서는 북측에 큰 부담이 가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분고분하고 조심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번 15차 남북장관급회담은 회담 후에 전개될 상황이 우리의 우려를 더욱 심화시켜 주고 있다. 많은 국민들의 깊은 성찰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동복 /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