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속도조절’ 논란 배경과 전망

한국과 미국 외교가에 `속도조절론’이 회자하고 있다.

이른바 남북관계와 북한 비핵화의 진전 정도를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를 놓고 한국과 미국이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속도조절론의 골자다.

이런 의견은 주로 미국의 고위관리들이 제기하는 양상이다.

우선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14일(현지시간) 방미중인 신기남 국회 정보위원장과 만나 “남북관계와 6자회담은 같이 가야 한다”면서 “남북 정상회담은 필요하면 할 수 있지만 북한이 6자회담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고 신 위원장이 전했다.

힐 차관보는 또 남북한과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는 4국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앞서 신 위원장을 만난 데니스 와일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도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 이행을 지켜보면서 한미 간에 시기문제를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는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16일 이재정 통일부 장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남북화해협력과 6자회담 합의이행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미국 인사들의 이런 발언들이 남북 철도 경의선과 동해선이 56년만에 연결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미국이 6자회담을 지렛대로 남북관계 진전에 제동을 거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현 정부 외교정책 결정에 깊숙이 간여하는 한 고위소식통은 “한반도를 바라보는 한국과 미국의 기본시각, 그리고 전략적 이해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민족분단 현상을 타파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과 세계전략 차원에서 북한을 관리해야 하는 미국의 기본적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그러나 “미국이 한국에 속도를 조절해달라고 요구한다는 시각은 아주 단선적이며 갈등지향적이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은 물론 미국내에서도 제 정파간 다양한 시각이 노출되고 있는 상황을 탄력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현 국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 소식통은 지적했다.

현재의 복합적 국면은 6자회담이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로 상당기간 진전을 보지 못하는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돼있다고 이 소식통은 설명했다.

우선 국내적으로 볼 때 6자회담이 두달 가량 공전되면서 남북관계 현안과 어떻게 조화를 이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한동안 지속됐다.

통일문제를 담당하는 부처와 일부 진보성향의 정부 핵심당국자들은 BDA 문제가 예상치 않은 실무.절차적인 이유로 해결되지 못하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이용해 보다 적극적인 해결노력에 나서자는 의견을 개진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서 수출입은행을 BDA 북한자금의 제3국 송금을 위한 중계지로 활용하자는 의견을 낸 것도 이런 흐름이다.

이들은 하루빨리 BDA 문제를 매듭짓고 6자회담을 정상화시키는 한편 남북관계 현안의 진전도 빨리 도모하자는 주장을 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한동안 남북정상회담의 조기개최설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6자회담 등 북핵 이슈를 담당하는 부서 등이 가세해 정부 전략을 숙의한 결과 대략 ‘6자회담의 진전과 남북관계의 진전을 병행, 또는 선순환적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16일 정례브리핑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은 6자회담 비핵화 진전과 남북관계 진전이 상호 선순환구조에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라면서 “그 문제는 한국 정부가 판단해서 취하고 있다”고 강조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예상대로 BDA 문제가 이번 주 또는 내주쯤 해결되는 상황이라면 정부의 내부 혼선은 가까운 시기에는 재연될 가능성이 낮은 상황이다.

미국내 상황도 국내와 비교적 비슷한 양상인 것으로 외교소식통들은 보고 있다.

한때 막강한 힘을 과시했던 네오콘(신보수주의자) 등 강경파들이 거의 대부분 퇴진하고 힐 차관보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이어지는 협상파가 외교정책 수립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원칙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평가다.

다만 협상파들은 BDA 문제로 북한에 끌려가는 양상으로 보이면서 서서히 미국내 강경파들이 고개를 들려하는 상황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는 양상이다.

따라서 이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북한 비핵화 로드맵을 촘촘하게 짜고 있다는 후문이다.

BDA 문제가 늦어도 내주까지 해결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힐 차관보가 해외출장일정(18-25일) 기간에 비공식적으로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양자회담을 가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북.미 양자회담이 성사되면 2.13 합의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초기조치를 신속히 이행하고 2단계 조치에 해당하는 핵시설 불능화를 위한 구체적 논의와 함께 핵 프로그램 신고, 중유 100만t 지원 등이 로드맵으로 명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 지난 3월초 뉴욕에서 열린 양자회담에서 연내 불능화와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를 비롯한 양자 관계정상화에 양측이 의견을 모은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이번에 열릴 양자회담에서 보다 극적인 조치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 핵문제가 해결된 이후 북미관계를 전면적으로 빨리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이해찬 전 총리의 전언도 이럴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북.미 양자회담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입북에 이어 차기 6자회담이 열리고 6자회담이 끝난 직후 힐 차관보의 북한 방문 및 영변 핵시설 폐쇄현황 확인, 나아가 6자 외무장관 회담이 가까운 시일내에 열릴 것으로 외교가는 전망하고 있다.

힐 차관보가 신기남 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IAEA 사찰관을 복귀시키고 사찰 프로그램에 합의, 영변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 등을 폐쇄하고 이를 검증받는데 동의해야만 북한이 진정한 변화의 길을 간다고 확실할 수있다”며 “그런 상황이 되면 정상회담 등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은 미국 협상파들의 향후 시간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언급이 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정부 핵심당국자들도 “힐 차관보의 인식이 바로 우리의 인식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일부 정치인이나 정부내 인사들이 주된 흐름에서 벗어난 발언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 정부의 정책을 좌우하는 핵심당국자들의 입장은 확고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부 북핵 로드맵에 있어서는 미국내 강경파를 의식한 힐 차관보가 우리 측보다 더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 ‘속도조절’을 우리 측이 요구할 때도 있다는 후문이다.

한 정부 소식통은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협상의 장으로 유인하느냐는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고민해야 할 주제”라면서 “양측이 지혜찾기에 주력하기 위해 충분히 협의할 채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