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상대 손배소 탈북여성 ‘구겨진 인생’ 풀스토리

1960년대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으로 이주했다 탈북한 재일동포 여성이 최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을 상대로 위자료 등 약 1천만엔(약 9천7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03년 북한을 탈출해 현재 오사카에 살고 있는 고정미(47) 씨는 재일 한국인 2세로 조총련이 주도한 ‘북송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수용소에 수감되어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고 씨는 소장에서 “조총련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면서 일본 거주 동포 귀환사업을 벌였으나 북한의 생활 실태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일본에는 약 170여 명의 탈북자들이 정착해 살고 있으나 ‘북송사업’과 관련해 조총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는 처음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회’를 통해 입수한 고소장을 바탕으로 고 씨의 인생 역정을 재구성해봤다.

불행의 시작… ‘귀국선’에 오르다

고정미 씨는 1960년 9월 23일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고 씨는 부모는 제주도 출신으로 아버지는 1962년 사망했다. 아버지 사망 후 고 씨의 어머니는 아이 둘 달린 남성과 재혼했다. 북한으로 건너갈 당시 고 씨는 3살이었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3명의 아이를 데리고 혼자서 어떻게 생활할 수 있겠는가. 북한에 가면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설득을 받아 북한행을 결심하게 된다.

고 씨는 양부와 어머니, 이복형제들과 함께 1963년 10월 18일 제 111차 귀국선을 타고 북한 함경남도 청진시에 도착했다. 이때 고 씨의 오빠는 청진시의 풍경과 마중 나온 사람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해 “배에서 내리고 싶지 않다. 일본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고 씨와 가족들은 배에서 내린 뒤 ‘귀국자 초대소’(귀국자들의 배치 지역이 정해질 때까지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장소)로 보내졌다. 오빠는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일본으로의 귀국을 요구했고,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그는 북한 관리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남겨진 가족들은 신의주로 배치 받아 이동하게 된다. 북한과 조총련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희망으로 결심한 귀국이었지만 도착부터 가족 간의 이별이라는 불행을 맛보게 된 것이다.

깨어진 환상…‘지상낙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고 씨 가족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양부와 어머니는 북한 사회의 제도를 따르기 위해 매일 밤늦게 까지 밖에서 일해야 했다. 고 씨의 어머니는 주부였지만, 북한에서는 주부들도 여맹의 지시로 각종 노동에 동원된다. 어머니는 보통 아침 6시 새벽작업에 나섰다. 각 세대 당 1명 씩 나가야 하는데 대개는 어머니가 나갔다. 도로 청소, 건설용 돌 수집 등의 일은 아침 8시까지 계속됐다.

김정일이 그 마을을 방문한다고 하면 김정일의 차가 지나가는 도로에 걸레질을 했고, 흙 부대를 지고 날라야 하는 중노동에 동원됐다. 이 작업이 끝나면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는 여맹 사무실에서 일을 했고,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는 생활총화에 참석했다.

1968년 5월 고 씨와 가족들은 귀국 직후에 헤어진 오빠를 만나러 갔다. 오빠는 제49호 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제 49호 병원은 정신병원으로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요코다 메구미가 입원했다 사망한 장소라고 북한 당국이 발표했던 곳이다.

병원의 바닥은 오물 천지에 환경은 열악했다. 5년 만에 재회한 오빠는 너무나 달라져서 아버지마저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신체가 다부졌던 오빠는 정면으로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가족들은 망가진 오빠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 후 1971년 오빠의 사망통지서가 집으로 도착했다. 양부와 어머니는 시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오빠는 끝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공포…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

고 씨는 인민학교에 다니게 됐다. 고 씨는 학교에서 ‘쪽빠리’라는 놀림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오전에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작업을 나가기 위해 교복에서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는데 일본에서 가져간 옷은 북한 옷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질과 디자인이 좋았다. 그것을 본 다른 학생들은 옷을 벗기거나 찢는 등 고 씨를 괴롭혔다. 결국 고 씨는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다가 집에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 사회의 차별로 부터 도망 온 귀국자들은 동포인 북한 사람들로부터도 차별을 받아야 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에서의 송금이 허락돼, 고 씨 가족들의 생활은 안정을 찾게 된다. 가족들은 일본에서 송금된 돈과 가져온 보석들을 팔아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76년 3월 양부가 돌연 행방불명 됐다. 한 달 동안 가족들은 양부가 갈 만한 장소를 모두 찾아봤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양부의 직장에 몇 번이나 찾아가 봤지만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른다. 집에 돌아가서 기다려라”는 답만 들었다. 고 씨의 가족들은 마치 초상집처럼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1976년 7월 2일 공장의 한 간부가 집으로 찾아와 “절대로 나에게 들었다고 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고 씨의 아버지가 현재 ‘벽돌공장’에 보내졌다고 털어놨다. 어머니는 “벽돌공이 무엇인가? 왜 집에서는 출퇴근 할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나중에 귀국자 가족들에게 사정을 들은 어머니는 “가족 누군가가 벽돌공장에 보내져 5개월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 모두를 데려간다고 한다. 좋은 물건은 전부 빼앗아 가고 간단한 물건만 챙겨 트럭에 실려지면 영원이 나올 수 없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다. 거기에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앞으로 학교에도 가지 말고 반드시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소에 언제나 공부하라고 얘기했던 어머니였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어린 고 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느낄 수 있었다. 그해 8월 30일 한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아버지를 데려왔다”고 소리쳤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보니 처참한 몰골의 양부가 문에 기대어 있었다. 백발의 노인이 되 버린 양부는 속옷만 몸에 걸치고 있었고, 온몸은 벼룩투성이였다.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양부는 바로 쓰러져버렸고 가족들은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후회…귀국자는 ‘위험분자’로 낙인

양부는 몸이 회복된 이후 그동안 그가 겪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귀국사업은 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서 실시됐다. 북한 관리들은 처음부터 귀국자들의 운명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들의 위선적인 행위의 목격자, 체험자가 된 귀국자를 위험 분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대대적인 귀국자 사냥에 착수한 것이다.

자신들의 야심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을 버러지 정도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북한의 위정자들이다. 나는 모든 혐의를 전면 부정해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독한 고문에 시달리다 하지도 않은 일들을 인정해버렸다. 이 반년 동안 지금까지 상상한 적도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귀국자들은 북한 위정자들에게는 낚싯밥 같은 존재다.”

양부가 잡혀간 이유는 조선노동당 입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양부는 귀국 이후 경험을 통해 노동당에 대해 속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당을 거부했다. 양부는 고 씨를 포함해 자녀들의 입당도 반대했다. 그 후 양부는 1977년까지 집에서 요양했다. 그 뒤 1980년까지 원래 일하던 제지공장에서 일했다. 양부는 혼자 있을 때 조총련에 속아서 많은 사람들을 북한에 귀국시킨 것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통탄하며 말년을 보냈다.

굶어죽은 시체 치우며 北현실 깨달아

고 씨는 1976년 신의주 제1사범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평안북도 체육단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의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두 명의 자녀도 낳았다. 당시 안정된 생활을 하던 고 씨는 북한의 정치적 선전에 물들어 갔고 언젠가는 김정일이 미국을 때려눕혀 세계 최강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까지 품고 있었다.

그런 고 씨의 생각이 변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여느 때처럼 강사 활동을 하던 그녀는 대학으로부터 긴급 연락을 받고 35일 동안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치우는 작업을 하게 된다. 북한 당국은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엄수를 당부했다.

사체에는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 사람들은 이 고장 사람이 아니고 기아가 지독했던 북쪽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극심한 기아 현상이 북한 전역을 휩쓸게 된다. 고 씨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평양과 지방,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왜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생각하게 된다.

고 씨도 이때까지는 탈북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1996년 귀국자 남성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돼 대학 강사에서 해임되고 아이들까지 추방명령을 받게 됐다. 이때 고 씨는 처음으로 김일성 정권에 대한 반발의 감정을 느꼈다. 고 씨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당과 법 기관을 찾아갔지만 당 간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경솔한 일처리가 문제시 될까봐 조기 추방을 결정하게 된다. 결국 고 씨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탈북, 강제북송, 그리고 재탈북

고 씨는 1년 반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걸쳐 압록강을 넘어 탈북에 성공한다. 선양까지 가게 된 고 씨는 중국 공민증을 얻기 위해 갖고 있는 돈을 모두 지불했지만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만다. 옌타이까지 가게 된 고 씨는 한국 유학생의 도움으로 돈도 모으고 아이들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 한국이나 일본에 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사람을 만났지만, 마침 옌타이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려던 탈북자들이 중국 공안에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 씨는 대대적인 체포 작전이 벌어지면 지금까지 도와준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것이란 생각에 공안국에 자수하게 된다. 중국 공안은 그녀를 북한으로 송환했다. 2003년 1월 23일 고 씨는 다른 송환자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던 중 구두에 붙여 둔 반지를 삼켰다.

고 씨는 배 안에서 고통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안은 그녀가 의치를 삼킬 지도 모른다고 펜치로 이를 뽑았다. 피투성이가 된 고 씨는 그대로 기절했고, 공안원은 의식이 돌아온 그녀의 몸을 침대에 테이프로 동여맸다. 잠시 후 가위를 가져온 공안원에게 반항하다 왼쪽 어깨까지 찔렸다.

신의주 보위부에 넘겨진 고 씨는 1개월 정도 독방에 갇혔다. 간수들은 하루에 한번 씩 고 씨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회복 기미가 보이자 고문을 시작했다. 기절할 때까지 폭행이 가해졌다. 간수들은 고 씨를 옌타이 사건의 일당으로 추궁했다.

2003년 4월경 고문과 영양실조로 산송장 상태가 된 고 씨는 병원으로 이송됐다. 항문이 벌어지고 혀가 밖으로 늘어진 상태가 되었던 그녀는 몸이 회복되자 일시적으로 석방됐다. 고 씨의 아들도 2002년도 베이징에서 송환돼 수감되어 있었다. 고 씨는 석방된 후 수감되어 있는 아들과 재회했다. 아들은 40kg도 채 안 나갈 정도로 말라 있었고, 부축이 없으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고 씨는 아들과 함께 평안북도 시골지역에 추방당했다. 그러나 고 씨는 계속해서 탈북을 생각하게 됐고, 결국 2003년 말 탈북에 성공해 2005년 일본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