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걷는 힐차관보..기로 선 북핵협상

“힐 차관보는 지금 사방으로 고립돼(isolated) 있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위태 합니다”

미국의 중진의원들과 행정부 관리들이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에 대한 워싱턴 기류를 최근 한국 관계자들에게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힐 차관보에 대한 불만은 비단 공화당내 보수강경파들에게만 국한되는게 아니다. 민주당 심지어 국무부내 동료들에게까지 확산돼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힐, 계통 밟지 않는다” 불만 고조 = 핵심은 힐이 북핵문제와 관련해 조지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힘만 믿고 주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계통을 밟지 않고 부시-라이스와 직거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 강경파의 거두인 딕 체니 부통령이 심히 못마땅해 하고 있고, 그의 그늘하에 있는 존 볼턴 전 유엔대사가 최근 부시 행정부의 대북 외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도 이런 배경을 깔고 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한 고위관계자도 최근 외교전문가인 대통합민주신당 정의용(鄭義溶)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힐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극에 달하고 있는 워싱턴 기류를 소상하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강경파들 사이에서 ‘힐이 최근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해지고(arrogant) 있다’는 비난이 고조되고 있다”면서 “체니가 힐을 집중 견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소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관계자는 또 “토머스 시퍼 주일미대사가 친구인 부시에게 개인전보를 보내 현재 북핵협상 방향이 미일 관계를 손상할 수 있다며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려는데 깊은 우려를 전달했다는 정보를 워싱턴포스트에 흘린 것도 체니 부통령측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의 다른 고위소식통도 “힐 차관보가 부시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부시-라이스-힐 라인에 대한 불만이 강해지고 있다”면서 “특히 힐이 체니 부통령도 무시하고(bypass) 국방부 등 다른 부처와 협의도 하지 않는다는 불만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심지어 국무부 고위관리도 며칠전 한국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힐은 요즘 뜨는 사람(man of the day) 아니냐”면서 “그 친구 북한 김정일과 (노벨)상을 타는 줄 알았다”며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북핵 협상에 악영향줄까 = 이 때문에 북핵 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미 공화당과 행정부 강경보수파들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스라엘의 대 시리아 핵의혹 시설 공습으로 촉발된 북한과 시리아의 핵거래설을 집중 문제삼고 있다.

미 의원들은 라이스 장관을 지난 24일 하원 외교위 청문회에 출석시켜 북한 핵문제에서 ‘한 건’ 하기 위해 북한의 핵거래 의혹을 눈감아 주고 있는게 아니냐고 강한 불만을 토로했고, 라이스는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지금 워싱턴은 북미간 핵협상이 약간만 삐걱해도 곧바로 제동을 걸려는 기류가 강하다”면서 “강경파들에게 절대 구실을 주면 안된다”는 한 관계자의 말이 실감난다.

힐 차관보가 29일 베이징을 방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을 만나려는 것도 “강경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확실한 증거물을 제시해줄 것을 북측에 요청하려는 목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힐이 지금 북한에 희망하는 것은 ▲북한 핵프로그램의 완전한 목록 연내 제출 ▲북한이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플루토늄 50㎏ 인도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의혹 해명과 알루미늄관 등 자진 인도 등이라는 관측이 높다.

앞서 힐은 25일 미하원 청문회에 출석 이르면 2주내 신고절차를 시작, 12월까지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을 포함한다고 볼수 있는 목록을 확보하길 기대하며 “올해 말까지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이 더이상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美, 자이툰부대 파병연장 민감 반응 = 하지만 문제는 미 정가의 이런 비판적 기류가 대선을 앞둔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실제 정 의원을 만난 민주당 의원들은 한국 정부의 이라크 주둔 자이툰부대 파병연장 방침 발표를 환영하면서도 만약 한국이 이라크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면 “미국민들이 우방인 한국에게서 버림받았다(abandoned)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며 강한 우려를 표명했던 겻으로 전해졌다.

더욱이 힐이 강경파들의 집중 견제로 중도 낙마하는 사태가 빚어지면 천신만고끝에 해결의 가닥을 잡은 북핵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은 불문가지다.

무엇보다 북미, 남북관계가 또다시 갈등과 대결의 국면으로 회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한반도는 지금 중대국면을 맞고 있는 셈이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