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여성문제

북쪽에서 시문학(詩文學)을 전공한 내가 남쪽에 와서 우연히 공부하게 된 ‘여성학’은 양성(兩性)의 긍정적 관계개선으로 인류의 새로운 평화적 장을 펼쳐가는 매우 고무적인 학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여성학이 지금까지의 남북한 관계에 도전하는 최고 학문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 여성이 안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가 제기하는 어떤 과제에 부응하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되었다.

북한 여성문제가 정치화(政治化) 되어온 과정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이 선포되자 소련군의 후광 속에 원산 상륙(9월 19일)을 단행한 김일성은 9월 21일 평양에 입성하여 10월 10일 조선공산당을 창건하였다. 나흘 후에 평양 모란봉공설운동장에서 개선 연설식을 가졌고 한 달 후인 1945년 11월 18일, 북조선 근로단체조직으로서는 최초로 여성동맹을 조직하였다.

북한(김일성)이 여성동맹 조직을 이처럼 서두른 이유를 보기로 하자. 당시 빨치산 출신을 위주로 한 공산당세력은 ‘조직의 순수성’을 운운하며 대중을 포섭하지 않은 결과 타 세력에 함몰될 정황에 처해있었다. 이 위기의 상황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어느 정치 세력도 눈길 돌리지 않는 여성 – 당시로서는 미미한 존재로 취급되었던 – 일반을 주시하도록 하였고 그를 공산당 지지 확률을 가장 높게 낼 독립변수로 포착하도록 하였다. 하여 당 외곽단체로는 최초로 여성동맹이 북조선에 조직되었다. 뒤이어 직업총동맹, 민주청년동맹, 농민동맹이 결성되고 그 세력에 기반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창립 초기 이 모든 사회단체들은 명시적 성격만 띠었을 뿐 대중과의 유기적 연결이 안 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김일성은 토지개혁 법령, 남녀평등권법령,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을 발표하였다. 농민들에게는 땅을, 노동자들에게는 공장을, 여성들에게는 남자들과 꼭 같이 주권행사에 참여할 권리를 해당 사회단체를 통하여 부여하도록 함으로써 북한의 다수계급을 자기 영향 하에 확실히 들여세운 것이다.

김일성이 첫 민주선거를 이틀 앞두고 여맹 일꾼들을 만난 자리에서 여성들이 선거에 적극 참여하도록 강조한 사실은 김일성이 자기 세력의 지지자, 후원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얼마나 중시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국가 앞에 난제가 제기될 때마다 여성이라는 세력을 효율화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하여 전시에는 교환수 및 간호원 자격으로 여성들의 전선탄원(戰線歎願)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것은 남성 유일성으로 구성된 집단 특유의 거친 분위기를 유연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전투력을 일층 고조시키는 역할도 병행케 하였다. 물론 그에 앞서 가져온 보다 중요한 정치효과는 남녀평등의 구호 하에 ‘여성도 전선 참여를 할 수 있다’라는 ‘양성동등’ 이념 승리의 개가였다. 이는 김일성 개인의 창작품이 아니고 구(舊)소련 사례를 모방하는 과정에 얻어진 떡고물이었다.

전쟁이 끝난 전선에서 성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남자들은 많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전쟁히스테리환자들, 부상자들, 전사자들…. 이들로 인한 전후 인민경제건설의 인력 공백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북한의 도시와 농촌은 말 그대로 잿더미로 뒤 덮여 있었다. 어느 외신기자가 “백년이 걸려도 일어서기 힘들다”고 한 표현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한껏 지쳐있었다. 북한이 다시 일어서자면 어떤 획기적인 응집력이 필요했다. 남성노력자의 인력만으로 전후복구 건설은 절대 불가능 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김일성은 1958년 7월 19일 내각결정 84호 ‘인민경제 각 부문에 여성들을 인입 시킬 데 대하여’를 채택하였다. 여성들을 사회사업에 동원시켜 전후복구건설의 다급한 인력 공백을 메우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1966. 10. 20∼10. 22일까지 전국 보양원(保養員) 대회를 열어 그간 아동보육교양정책 수행과정을 총화하고 여성인력을 보다 효율화 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을 토의하였다.(북한의 탁아 보육제도 역시 구소련의 경험을 모방한 것이었다.) 1966년 11월 1일부터 ‘모성노동자들의 노동시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즉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모성노동자 중 만 13세까지의 자녀를 3명 이상 둔 여성은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줄였다. 또한 연속생산공정과 개별적으로 작업에 늦게 착수하거나 먼저 끝낼 수 없는 부문에서 일하는 모성노동자는 주중 5일(하루 8시간씩) 근무하고 일요일을 포함하여 주 2일은 집에서 휴식하게 하였다. 이 규정에 해당되는 모성노동자들의 식량, 노동보호물자, 사회보험에 의한 연금 지불, 정기휴가는 종전과 꼭 같이 보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현실화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장거리마다 널려진 게딱지같은 술집들, 월급 타는 날이면 돈 봉투 차고 집에 가는 남자들을 악착하게 꼬셔 들여 주머니란 주머니마다 탈탈 털어 내던 그 숱한, 그 영악한 ‘길거리 여자’들……. 김일성은 ‘건국사상 대개조운동’이라는 또 하나의 발상으로 이런 ‘비(非)사회주의적’인 여성들까지 사회주의 대건설에 깡그리 끌어들였다.

여성들을 노동에 대거 인입시킴에 있어서 그래도 발목을 잡는 것은 역시 어린이 보육문제였다. 단순한 보육차원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1971년 8월부터 탁아소, 유치원에 전문 의료일꾼을 배치하고 보육교양시설을 여성들의 일터에까지 대대적으로 구축(그전에는 인구 밀집 구역들에 탁아, 유치원이 있었음)하도록 하였으며 유치원 탁아 부식물공급체계를 새로 도입해 육아보육제도의 물질적 토대까지 조성시켜 놓았다.

1972년에는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임금권, 여성노동의 보호, 유해노동 금지, 산전산후 휴가, 가내작업반 및 가내협동조합 설치 등 여성을 위한 실질적 조치들을 사회주의 헌법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77일이던 산전산후휴가를 120일로 늘이도록 하였다. 두 달 된 신생아를 탁아소에 맡긴 결과 발병률이 높고 그로 인한 자모의 병결률(病缺率)이 증가한 탓이었다.

북한이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서면서 여성문제를 또 한 번 정치화하는데, 1990년 새로 제정한 가정법에서 가정부양의무자를 가족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가정부양의무자를 ‘국가’로 설정했던 종전 법으로부터 국가가 도피하여 그 짐을 ‘가족’의 이름 하에 여성 일반에게 일방적으로 넘겨씌울 수밖에 없었던 북한의 암울한 실태가 반영되어 있었다.

최진이 / 前 조선작가동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