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온갖 테러의 집합 국가

▲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동시다발 테러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성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테러리즘은 ① 특정인사나 세력, 국가기관에 대한 공격 등 특정 목표에 대한 테러, ② 공포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무차별 대중을 향한 테러, ③ 국가권력이나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한 인민대중에 대한 공인된 테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힘이 없는 세력이 힘이 강한 세력에게 대응하는 시위용으로 테러하는 경우와 특정인을 제거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려는 경우로 나눠 볼 수 있겠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는 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김구선생 암살, 미국 대통령 존 F케네디 암살, 95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암살 등의 후자의 테러수법이다.

두 번째의 경우, 아일랜드 공화군이나 바스크 분리주의와 같은 일단의 분리주의자들, 적군파와 같이 몰락해 가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세력, 극단적인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테러조직화 되어 아직도 현대사회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이번 미국의 테러사건 또한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의 테러는 이른바 ‘공인된’ 테러로, 사실상 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비린내 나는 정복과 폭력에 의한 통치는 인민에 대한 테러(공포정치)에 기반해 있다. 작게는 한 마을을 불사르거나 크게는 도시 전체를 말살하여 수십만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 정복의 역사와, 통치의 용이성을 위해 일반 인민에 대한 살육과 고문, 부당한 체포와 구금 등 공인된 테러를 통한 공포정치는 민주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늘상 겪는 일이었다.

‘Seven sisters’ 가운데 선두인 북한

심지어 자유와 평등, 인간해방을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조차 이 공인된 테러는 너무나 당연하게 자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역시 공산주의에 반대하며 싸운 세력 역시 테러를 통한 공포통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정복과 독재의 시대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세 번째의 경우는 아프리카의 독재국가 등 극소수의 경우만이 남아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역시 점점 세계에서 그 설자리를 잃고 있었다. 북아일랜드의 평화협정과 밀로셰비치에 대한 전 세계의 응징,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철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민주정부 수립, 아프리카 대륙 나라들의 민주주의 일부 진전 등 점점 테러리즘을 통한 정치적 목적 달성은 설 땅이 좁아져 왔다. 사실 21세기의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평화지상주의가 문제가 될 정도로, 남아있는 독재국가나 테러조직들에 대한 관심과 경각심 또한 줄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2001년 미국의 9.11테러 사건은 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아직 지구상에는 테러(공포)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려는 세력이 남아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구상에는 아직도 독재정권이 남아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9.11 사건 이후 외무성 대변인 이름으로 “온갖 형태의 테러와 어떠한 지원도 반대하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북한은 현재 미 국무부가 지정한 테러지원국에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와 함께 지정되어 있고(이 일곱 국가를 이른바 ‘Seven sisters’라고 한다), KAL기 폭파이후 14년 간이나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부에서는 테러는 정치적 이유로 가미된 것으로 적대적 관계인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정권은 위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테러의 행위를 모두다 저질러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주요 테러

첫 번째, 요인암살 목적의 주요 테러

–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 1월 21일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의 124군 소속의 김신조를 포함한 무장공비 31명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한 청와대 습격. 7명의 군경과 민간인 살해, 28명의 공비 사살, 2명 도주, 1명 체포

– 1970년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 6월 22일 북한간첩 2명이 6.25 기념식에 참가할 정부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현충문에 폭탄을 장치하던 중 조작 실수로 폭발, 건물일부 파손(1명 폭사, 1명 도주)

▲ 1983년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

–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 8월 15일 북한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교포2세 문세광이 ‘8.15기념식장'(서울 국립극장)에서 박대통령을 저격했으나 실패. (육영수여사 사망)

– 1983년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 :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방문중이던 한국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의 아웅산 국립묘소 참배를 이용, 암살하기 위해 사전에 이 묘소건물 천정에 설치한 원격조종폭탄을 폭발시켜 한국의 부총리·장관등 수행원 17명을 순국케하고 14명을 부상시키는 테러를 감행했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대위, 신기철대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두 번째,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주요 테러

– 수많은 어선에 대한 나포 및 선원 억류

– 1967년 경원선 철도(포천) 폭파(열차 5량 중 3량 탈선)

–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무장공비 120명이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하여 10세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들을 살해한 사건. 남한측에선 20여 명의 사망자 발생.

▲ 김정일의 지시로 KAL858기를 폭파한 김현희

– 1969. KAL(YS-11)기 납북 : 12월 11일 북한간첩 조창희가 강릉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KAL기를 하이재킹,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51명 중 39명 송환, 승무원 등 12명 미송환)

– 1987년 KAL기 폭파 : 11월 29일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 소속의 공작원 김현희와 김승일이 대한항공 858기 기내에 시한폭탄을 설치, 버마해역 상공에서 공중 폭파시켰다. 이 비행기에는 대부분 중동에서 건설근로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탑승객 115명이 전원 사망하였다. 역시 “88 서울올림픽 개최방해를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명령을 받았다.

– 1996년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 : 9월 18일 무장공비 26명이 승선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상어급 소형잠수함(350t)이 강릉시 안인진리 앞 해상에 침투하였다. 민간인과 군경 17명이 살해당했고 북한군은 1명 생포(이광수), 13명 사살, 11명 집단피살, 1명이 도주하였다.

세 번째, 북한 주민에 대한 공인된 테러

– 정치범수용소 : 북한 주민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말 한 마디 잘못하여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소문만 무성하게 나돌던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1992년 강철환, 안혁의 증언을 시작으로 수용소의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안명철의 증언과 완전통제구역이라 불리는 곳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김용씨의 증언으로 그 실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20여 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식량난 이후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 공개처형 : 인민재판에서 출발한 공개처형은 대부분의 북한 주민이라면 한 번쯤은 목격할 정도로 북한에서는 일반화되었다. 언제 어디서 공개처형을 시킨다는 공고문이 나붙으면 어른들은 모두 참석해야 하고 공포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머리를 먼저 쏘고 가슴과 다리를 각 3발씩 쏜다고 한다. 사형수들은 흉악범들도 많지만 식량난 이후 체제수호 차원에서 경제사범들에 대한 공개처형도 많아졌다고 한다.

▲ 가장 심각한 테러는 인민에 대한 폭압과 공포정치. 올해 3월 1일 회령시에서 실시된 공개처형의 모습.

– 고문과 구타 : 북한에서는 출신 계급에 따라 차별이 심하고 부패와 특권이 강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이용한 고문가 구타가 빈발하고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정치범수용소에서의 고문과 구타는 너무나 일상적일 뿐 아니라 사회안전성 요원들의 일반 주민이나 장마당 상인들에 대한 폭행, 노동단련대에서 감독관들의 무자비한 폭행또한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폭력의 일반화는 일반 주민들의 행동양태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굶주림에 대한 고의적 방치 : 지난 식량난 시기 300만 명 이상의 북한 주민들이 아사했다는 사실은 김정일 정권의 고의적인 방치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정일 스스로 “인구가 2,000만 명이 넘으면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 대목에서 김정일 정권이 식량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커녕 그럴 의사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김정일 정권은 인민경제 해결을 통한 정권안정보다는 부족함을 통한 통치의 효율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기타 셀 수 없는 폭압기구 및 폭압장치

테러로 유지되는 정권, 오래 가지 못한다

사실 북한에서 지금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자국민들에 대한 공인된 테러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테러의 경우에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응징을 각오해야만 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그 횟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북한 주민에 대한 테러는 식량난 이후 이완된 사회분위기를 통제하기 위하여 더욱 강해지고만 있다.

김정일이 생존전략으로 군(軍)을 통한 통치를 계속하고 있고, 부분적인 개방에 대비한 내부 체제 단속이 중요해지면서 그 폭력적 양상이 광범위하고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내부 경제시스템이 붕괴되어 주민들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면서 특권을 이용한 폭력이 일반화되어 있다. 문제는 김정일 정권 스스로가 폭력과 강압을 통한 독재통치를 펼치다보니 이러한 사회현상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론 즐기면서 주민들간의 공포와 폭력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

세계는 폭탄테러나 하이재킹, 요인 암살과 같은 시각적 효과가 큰 테러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경악하고 분노하지만 북한과 같은 소수의 독재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테러를 통한 공포통치”에 대해선 이상스러울 만큼 무관심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세계인들은 이러한 독재국가가 존재하는 한 인류의 진보는 커다란 장애를 만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김정일 독재정권의 폭력과 공포를 통한 통치 역시 조만간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