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시작되는 평양시 여성들의 수난

▲ 평양 거리의 여성들 (사진:연합)

봄이 완연하다. 가볍고 얇은 질의 옷을 너도나도 갈아입는 이 시절엔 무겁던 마음마저 덩달아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 와서 완성된 것이지 평양에서 살 때 봄을 맞는 느낌은 지금과 달랐다. 봄철과 함께 시작되는 여성 옷차림에 대한 국가적 통제 때문이었다.

봄철이 되면 평양 여성들은 아주 골치가 아팠다. 국가가 여성들의 바지 입는 현상을 겨울 한철은 모르는 척 하고 있다가 봄이 시작되면서부터 눈뜨고 봐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 지원은 아녀자들의 몫

그런데 봄철은 국가적인 농촌지원 계절이었다. 4월 말경부터 6월 초까지 평양시 모든 비생산직 사람들은 국가에서 지정해 준 주변 농장에 노상 출퇴근해야 했다. 업무가 긴급한 사람들만 제외하고는 밥 먹는 사람은 모두 농촌지원에 총동원시키도록 법 기관까지 나서서 통제하였다.

이때 참 묘한 것이 어느 기관, 어느 기업소에서나 농촌지원조차 못 내보낼 정도의 긴급한 과제가 제기되는 사람은 몰래 남아서 자기 일을 하게 하는데 그 중엔 여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농촌지원이 시작 돼서 20일쯤 지나다 보면 남자들은 무슨 구실이든 붙여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까지 끌려 다니는 것은 힘없는 아녀자들뿐이었다.

밖에 나가서 찬바람도 쏘이고 좋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하루 이틀 정도라면 몰라도 동원일수가 15~20일을 넘어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우선 출근시간을 1시간 앞당겨야 하는 불편이 있다. 교통조건이 안 좋아 주변농장까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오가는 데 하루 품이 다 들었다. 교통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여자들이 가방마다 위아래 작업복에 작업신발까지 두툼하게 넣어가지고 다녀야 하는 수고는 결코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다.

농장에 일하러 가는데 치마를 입으라고?

농장 일을 치마차림에 할 수는 없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작업장에서는 작업복을 입는 것이 예의였다. 그 작업복을 집에서부터 입고 농장까지 출근하면 한결 간편하련만 그것은 당사자들 마음일 뿐이었다.

평양시내 중심거리의 지하철 입구, 버스정류소, 사거리 교차로 등 시민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길목들엔 꼭 규찰대들이 완장을 끼고 서서 바지 입은 여자들을 눈에 불을 켜고 잡아냈다. 그 자리에서 벌금을 부과하던가 해당기관 당 조직에 통보하였다. 그 여성은 바지 입은 죄로 돈을 털리던가 월 당총화나 종업원모임 때 비판 감이 되기가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편한 차림을 하고 싶은 여성들의 욕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작업이 끝나고 물도 없어 씻지도 못한 먼지투성이 몸에 정장을 갈아입는 일은 통제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더러워진 몸이 깨끗한 옷 입기를 매번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규찰대와 쫒고 쫒기는 눈치싸움

그럴 때면 여자들은 빨찌산을 했다. 작업복 차림 그대로 퇴근하다가 시내 중심가에 들어서면서 규찰대의 존재를 온 정신을 다해 살폈다. 규찰대가 안 보이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하철에 들어섰다. 규찰대가 날이 어둡도록 철수하지 않고 ‘바지차림여성 잡기’에 골몰하는 경우엔 가로수나 아파트 벽체 옆에 몰래 숨어 있다가 규찰대가 딴 눈을 팔거나 할 때 사람들 틈에 끼어 살짝 통과해 버렸다.

그러다가 한번 걸리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거울인 수도 평양을 어지럽게 하려는 진의가 무엇인가 하고 추궁을 받았다. 한 번씩 시달림을 받고나면 소름이 쭉 끼쳐 죽어도 바지는 안 입는다며 치마를 입었다. 그런데 평양시 전반의 교통조건이 말이 아니었다. 한 번 버스 타는 데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어떤 때는 몸싸움을 하다 치마단이 뜯겨져나가 속옷이 드러나기가 일쑤였다. 그때면 바지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성들이 옷차림으로 당하는 수난은 그래도 뼛속까지 사무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 계절에 당하는 여성들이 정신적 차별이었다. 정신노동을 하도록 준비된 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일 천하고 제일 육체적인 일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녀야 하는 이 절망감은 그 당사자의 정신을 몇 번이나 죽이고 남음이 있었다.

바지와 치마도 선택할 수 없는 북한 여성들

게다가 대다수가 여성으로 이루어진 봉사기관 사람들은 ‘*정춘실운동’ 이라는 명목 하에 시외의 불모지를 농토로 개간해 식품원료를 심고 거두어들이는 일에 말려들면서 봄철에는 가족을 버리고 밭에 나가 살아야 했다. 그 여성들의 봄철에 대한 원망 또한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봄철은 독재와의 소리 없는 싸움 속에서 여성들이 치마입기에 서서히 길들여지는 계절이다. 치마를 이유로 여성을 빌미로 북한 전반에 대한 독재가 잊혀지지 않고 시작되는 계절이다.

최진이 / 前조선작가동맹 시인

*정춘실 운동
자강도 전천군 사업관리소 소장 정춘실의 모범을 따라 배우자는 운동. 상업관리소는 국영상점에 물건을 공급하고 판매하는 단위로, 주민들에게 생활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기구이다. 정춘실은 상업관리소 소장을 하면서 ‘우리가정수첩’이라는 것을 가지고 다녔는데, 여기에 담당 주민들의 생활형편을 적으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살폈다고 한다. 훗날 정춘실은 김정일과 가깝게 지내고 부정축재를 하는 바람에 주민들 사이에 신임을 잃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