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급제를 해체시킨 것은 장마당의 위력이었다”[3]

▲ 지난 8월 촬영된 평양 락랑구역의 장마당 <제공:아시아프레스>

질문: 국가가 미공급(배급량 부족) 사태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자 주민들이 스스로 마련한 대책은 무엇인가?

하지만 눈 여겨 보면 고난의 조선은 비관적이고 암담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제 재생의 출구를 시사하는 희망과 가능성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펼쳐졌다. 장사가 국가 이전에 발생한 인간의 삶의 방식이었으며 우리는 그 무궁무진한 힘을 자기 자신 속에 분명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두 눈 부릅뜨고 다들 자각했다.

그 전까지 오로지 배급제 밖에 몰라온 인민은 고난의 행군 초기 ‘미공급’의 충격에 쓰러지게 되자 국가 앞에 더더욱 엎드렸다. 당과 국가는 그런 인민대중을 싸늘한 얼굴로 외면했다. 핵심 계층이 내미는 애원의 손길에까지 묵묵부답했고 권력자들은 그 틈을 타서 개인축재에만 더욱 열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만이 붉은기를 안고 굶어 죽고 만다”는 백성의 통곡에 정신이 버쩍 든 듯 했다. 당과 국가의 본색을 깨달은 인민이 분연히 일어 섰다. 당과 국가의 본색을 깨달은 인민들은 장마당으로 달려갔다. 수십 년간 잠들고 있던 백성의 장사귀신이 깨어났다. 그리하여 일어난 기적을 추려 보자.

첫째로, 타락한 국가 공급(배급)제를 대신하고 대외적으로 약하게(부분적으로) 개방된 장마당(상설 시장)식 전국 유통망이 탄생하였다.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출발점에서 점검해 보았을 때 배급제에 매여 살던 인민은 노동력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진짜배기 무산자였다. 이들은 자연적으로, 아니 붉은기(우리 식 사회주의)를 지키라는 국가의 요구를 뿌리치면서 노동력의 소비 수요가 있고, 유일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마당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장마당 확산으로 전국 유통망 탄생

짐을 나르는 사람, 가구를 짜는 사람, 빗자루를 만드는 사람, 담배를 마는 사람, 밭을 부치는 사람 등 닥치는 대로 자기 노동을 팔고 능력껏 상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만으로 전국 장마당이 완결 될 수는 없었다. 장마당에 대한 물질적 투입이 필요했다. 지금껏 굳게 닫혀 있던 국경의 문을 합법 또는 비합법적 무역업자(밀수꾼) 열어 제쳤다. 그들을 통해 들어온 중국 물자를 전국의 장마당에 널어놓았다.

시장경제가 이미 전개된 중국의 영향이 곧 조선 장마당들에 미치기 시작했다. 경쟁력이 우세한 중국 상품의 점유율이 증가하면서 조선의 약한 노동력(생산수단)은 심하게 제동 받았다. 공업 생산체계는 더욱 더 마비 되었다. 중국 공업상품이 무제한 들어와 조선의 물자들을 바닥이 나도록 말짱(모두) 끌어갔다.

구리 하나만 보아도 전주 위에 놓인 변압기나 펌프장 전동기의 동선, 심지어는 유색주 조직장(구리 작업장)에서 나오는 페설물(침전된 산화물)인 땅속에 묻힌 동재(구리 가루)까지도 빡빡(모두) 다 훑어 갔다.

노동력과 중국물자에만 의존해가지고서는 장마당이 더 성장할 수 없었다. 장마당이 자기의 용량을 늘이는 또 하나의 방법은 약탈과 도난, 그리고 위법적 봉사(예를 들면 대기숙박, 매춘, 금지된 오락, 마약, 고리대금 등)였다.

국가가 이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사회 치안은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 국영 기업의 생산 자재도 장마당으로 들어 갔고, 기업소의 생산자재 구입은 자연히 장마당에 의존하게 되는 등 이제 와서는 장마당의 흐름을 돌려 세울 수가 없게 되였다.

질문: 통화와 도량, 수송 사정은 어땠는가?

은행은 문을 닫았어도 사람들은 장마당을 운영하기 위하여 얼마나 쉴새 없이 돈을 사용했던가. 기억도 생생한 당시의 1원짜리 모습은 갖가지 종이 조각으로 닳고 단 완전한 누더기였다.

인민은 돈을 이렇게까지 버리지 않고 활용하고 또 활용하였다. 장마당에서는 맞저울(거래 상대방이 상호 저울을 준비해 무게를 비교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국가 검정 밖에 있는 장마당이라 해도 엉터리는 이제 더 통하지 않았다.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자기의 막대 저울을 휴대하고 다녔다. 물품을 사고 팔 때 확인을 위해 서로 맞저울질을 했다. 국영 상업은 오로지 감모(무게가 줄어드는 것)만 있었으나 장마당은 ‘써비(서비스를 더 보태주는 것)’를 보태 주었다.

장마당 상품 수송에는 동원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돈 소리가 나면 배속의 아이도 손을 내민다”는 돈의 힘으로 장사꾼들은 그렇게 어려웠던 국영 철도망을 보충하는 전국 자동차 교통망을 끝끝내 설립 시키고야 말았다. 일종의 교통 장마당인 이 자동차 교통망에는 현재 권력자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다.

민간 분야 분업 활성화

지금에 와서야 사람들은 이전에 자기들이 겪은 파괴적 대혼란이 돌이킬 수 없는 살인적 과정이기는 하였으나, 치열한 생존경쟁을 강요당한 인민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두 번 다시 주저 앉아 굶어 죽지 않을 ‘철의 장사법’을 배운 자립적 새 삶의 과정이었음을 눈물겹게 돌이켜 보고 있다.

둘째로, 장마당 분업이 형성 되었다.

장마당의 자극으로 드디어 분업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왔다. 생산에도 알사탕을 만드는 개인업자, 꽈배기(튀기의 일종)를 만드는 업자, 신발 만드는 업자 등이 나왔다.

판매에도 봇짐을 지고 다니는 장사꾼, 돈이 축적 되는 장마당에 앉아 파는(판매대를 운영하는) 장사꾼, 장마당들 간을 이동하면서 크고 작은 돼거리(장마당 간 물가 차이를 노리는 거래)를 하는 장사꾼, 그리고 소개를 전문하는 중개상인이 분업적으로 형성돼 전국적인 망을 완성하여 나갔다.

일례로 ‘써래기’라고 불리우는 생산-판매상(가내 수공업자)을 소개해 보자. ‘썰다’라는 말은 개인이 천필(원단)을 쌓아 놓고 본(모양)에 따라 자르는 행위를 말한다. 그 천의 양이 하도 엄청나 보여 이렇게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껏 국영공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규모의 의류 생산을 한 여자 상인이 제 돈을 투자하여 판을 크게 벌려놓은 것이다.

청년동맹이 태권도 경기대회를 위해 청년학생들에게 단체복 준비를 요구하면 이 정보를 쥔 여자 상인 ‘써래기’는 국경 도시의 상인에게 소요되는 천을 주문한다. 입수된 천을 구입해 (고용한) 일꾼들에게 재단을 시킨다. 재단된 천을 개인 재봉공들에게 맡겨 제품을 완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권도복을 넘겨받으러 온 상인들에게 맞돈치기(현장 결제)를 통해 현장에서 얼마를 받고, 얼마는 다음에 받기로 한다.

여기서 넘겨진 태권도복은 장마당으로 구석구석 퍼져 나간다. ‘써래기’가 운영하는 이 의류생산체계는 새로운 수요에 따라 의류를 생산하기 위해 또다시 가동된다. 형체를 갖춘 직장도 없이 여인들이 분업적으로 일을 나누어 맡고, 외국에 천을 주문 수입해 장마당의 수요를 신속하고도 충분하게 보장해나가고 있다. 계획경제는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할 수도 없었다.

질문: 새로운 장마당에 대하여 몇 가지만 더 언급하자. 이전 장마당과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생긴 장마당 간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전 장마당에 비한 새장마당의 특징은 우선 전민(全民) 참여의 장마당이라는 데 있다. 또한 식량을 비교적 버젓이 내놓고 팔게 된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장마당 전민 참여란 ‘직장 이탈’ 즉 무결(결근)을 의미하는데 이는 조선의 법에 의하면 (노동)단련대행에 속한다.

또한 장마당에 의한 식량구매는 2중 식량공급으로써 국가가 최대 범죄처럼 여겨왔다. 장사꾼들은 이러한 국가의 법에 대항할 정당성을 바로 국가로부터 보장 받아야 했다. 그 허가증이 다름 아닌 ‘미공급’이었다. 국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국가와 장사꾼 사이에 밀고 당기는 과정이 지속되긴 했으나. 수 차례에 걸친 국가의 배급제 회복시도는 (매)번마다 실패했고, 배급제 기관 측이 현재에 와서 일보일보 장마당에 발목을 잠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시점에서 보면, 관민이 대립 협조하여 배급제를 스스로 해체 되게 만들고 장마당을 전개해가고 있는 셈이다. 그 추동력은 바로 장마당의 우월성, 장마당의 위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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