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북입장 변화 배경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북한 핵문제 해결 의지에 의문을 감추지 못하던 회의론자들에게 베이징 6자회담 타결은 `미국이 정말 변한 것 같다’는 구체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부시 행정부는 북한 핵문제의 외교적 해결 의지가 확고함을 일관되게 강조해왔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취임초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도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비난하는 등 적대감이 묻어나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았다.

북미 관계는 당연히 경색됐고, 북한은 이런 가운데 부시 행정부에 진정한 핵문제 해결 의지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5년 9월 베이징 6자회담에서 북핵 공동성명이 어렵사리 채택됐지만, 미국이 때맞춰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계좌들을 동결시키고, 전방위적인 대북 금융압박을 가함에 따라 6자회담은 장기 공전에 빠졌다.

대북 금융제재가 불법 금융활동의 척결과 달러화 보호를 위한 정당한 보호조치라는 미국측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회담장을 뛰쳐나가 미사일과 핵실험을 잇따라 강행함으로써 양측간 갈등과 긴장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북미간 협상이 언제나 `벼랑끝’을 오갔음을 반증이라도 하듯 양측은 북한 핵실험을 뒤로한채 다시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베이징과 베를린 등을 오가며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한 속내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첫단계’ 합의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국무부의 한 관계자는 “북한이 지난해말과 1월 베를린 회담을 통해 미국 정부의 핵문제 해결 의지가 확고함을 이해한 것 같다”고 전했다.

북한을 이해시킬 수 있었던 미국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BDA문제에 대한 미국의 접근은 과거와 달라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불법활동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 법집행일 뿐이다’ ‘합법과 불법자금의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등의 말로 BDA문제가 협상대상이 아님을 강조해왔으나, 결국 이 문제를 놓고 북한측과의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으며 합법자금에 대한 동결해제를 검토하기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 고위 관리들이 거듭 강조하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CVID)” 핵폐기 원칙도 최근에는 들리지 않는다. 미국 정부의 협상 태도가 그만큼 유연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평화협정에 대해서도 미국측은 전에 없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의 방북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점 역시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부시 대통령이 올해 국정연설에서 북한 핵문제의 외교적 해결방침을 강조했을 뿐, 북한에 대한 비난 발언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도 격세지감이다. 라이스 장관이나 다른 관리들 역시 최근엔 북한에 대한 비난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의 이같은 대북접근 변화는 부시 행정부 내부의 전술적 변화에 따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라크 사태 등으로 곤경에 처한 부시 대통령이 북핵 문제에서만이라도 진전을 보고 싶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부시-라이스-힐로 이어지는 북핵협상 직할 체제가 구축됐다는게 워싱턴에서의 정설이다.

과거 북핵 협상에서 진전기류가 조성될 때마다 반격을 가하고 나섰던 딕 체니 부통령 진영의 움직임이 이번 베이징 회담을 전후해서는 거의 감지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큰 변화로 꼽힌다.

미 국무부는 이같은 여세를 자신하는듯 2008회계연도 업무보고서에서 2008년 초까지 북핵 협상을 마무리하고, 북한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의 해체 및 검증체제에 들어간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미국의 이같은 입장변화가 북한과의 핵협상을 일사천리처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부시 행정부 내의 많은 인사들은 북한이 정말로 핵무기를 포기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향후 협상 상황에 따라 이들의 입장은 좌우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