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북한 “쌀 공급에도 불만 표출은 배은망덕한 태도”

[정치사업자료 입수] "국가 조치에 저울질 말라" 입단속...주민들 "식량 판매, 인민 위한 정책아냐"

210515_량곡판매 정치사업자료
본지가 단독 입수한 ‘량곡판매와 관련한 당과 국가의 조치를 고맙게 여기고 서로 돕고 이끄는 집단주의 기풍을 높이 발휘하자’라는 제목의 정치학습자료. 해당 자료에는 “이번에 취한 당과 국가의 조치(국가식량 판매)를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 하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인민에 대한 가장 뜨겁고도 무한한 사랑의 조치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서로 도와주고 위해주는 공산주의적미풍을 발휘하여 당의 사랑과 은덕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가닿게 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사진=데일리NK

북한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곡물을 판매했음에도 주민 여론이 좋지 않자, 당국이 정책의 인민애적 요소를 강조하는 동시에 입단속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16일 데일리NK는 이와 관련 정치사업자료를 입수했다. ‘량곡(양곡) 판매와 관련한 당(黨)과 국가의 조치를 고맙게 여기고 서로 돕고 이끄는 집단주의기풍을 높이 발휘하자’는 제목의 이 자료를 통해 당국은 주민 교양에 돌입했다는 전언이다.

해당 학습자료 서두에는 “다 아는 바와 같이 당에서는 이번에 당면한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량곡(양곡)을 국가가 정한 가격으로 주민들에게 판매할 데 대한 온정 어린 조치를 취하였다”며 이번 조치가 당의 인민 사랑에 따른 정책이라는 점이 강조됐다.

앞서 본지는 평양과 양강도, 함경북도 등지에서 식량(쌀 1kg에 3500~4000원)을 싸게 판매하는 형태로 공급이 이뤄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건 이 조치를 포함한 국가식량판매소를 통한 식량 판매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료는 또 “일부 주민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식량 가격이 비싸다느니, 좀 더 낮추어주었으면 좋겠다느니 하면서 당의 사랑을 놓고 저울질하는 불손한 발언들을 망탕하게 하고 있다”며 개별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식량 가격을 올려 7,000~8,000원하던 백미를 국가에서 4,000원에, 강냉이(옥수수)는 2,000원에 판매한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지난해 1월 국경봉쇄 이후에도 1kg에 5천 원 이하로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했던 쌀 가격이 수급량 부족으로 양강도 혜산의 경우 지난 중순 이후 1kg에 7~8천 원까지 상승했다.

함경북도 온성 등 내륙 지역은 쌀 가격이 1kg에 1만 5천 원까지 치솟는 등 북한 시장물가가 불안정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일부지역 시장물가 폭등하는데 환율은 폭락…北 경제 이상 조짐)

이 같은 곡물 가격 폭등은 수급량 부족에서 기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임의적인 가격 조작에 따른 것이라며 시세 불안정에 대한 책임을 상인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특히 자료는 “수령이 베풀어 준 사랑과 배려에 천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지는 못할 망정 불손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이 나라 공민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은망덕한 행동”이라며 “당과 국가가 취한 조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면서 저울질하는 것과 같은 좋지 못한 발언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민들은 대체로 이달 초 국가에서 식량을 공급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당국이 무상공급 또는 국정 가격에 준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식량을 배급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초 예정됐던 날보다 일주일가량 공급이 지연된 데다, 시장가격보다는 저렴하지만 그에 준하는 가격을 받고 국가가 식량을 판매하자 주민들의 실망과 불만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들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돈없는 사람들은 국가가 판매하는 쌀도 사먹을 수가 없다”며 불만을 드러냈으며 일부는 “원수님(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인민을 위한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인민을 위한 정책이냐”는 직접적인 비판도 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도 이러한 상황을 예민하게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를 통해 “털어놓고 말하여 지금 어느 가정이나 할 것 없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이고 돈이 없어 국가에서 판매하는 식량을 사지 못할 가정들도 있을 수 있다”며 “(우리는) 돈이 없어 쌀을 사지 못하는 세대들을 도와주어 누구나 다 당의 배려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재 결과 당국은 ‘집단주의 정신’을 발휘해 자발적으로 어려운 세대를 돕도록 강조했을 뿐 실제 저소득층을 위한 지원 대책은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또한 김정은식(式) 자력갱생으로 풀이된다.

이런 가운데, 북한 당국이 국가식량판매소 운영을 안정화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곡물 판매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당국이) 시장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국가 식량 판매에 따른 부작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감시와 단속에도 나서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자료는 또 “이 공간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꿔 많은 식량을 사들이는 것과 같은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세 차익을 목적으로 쌀을 사재기하려는 움직임에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실제로 현금 사정이 여유로운 돈주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쌀을 사서 저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당국의 국가 식량 판매의 허점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할 전략을 세운 셈이다.

다만 자료는 “잘 타일러 주고 옳게 교양해야 한다”며 훈계 차원의 지침만 하달했을 뿐 구체적인 처벌 방법은 밝히지 않았다.

우선 성난 민심을 다독이는 데 목적이 있는 만큼 당분간 여론을 지켜보면서 교양 차원의 조치만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민 비난이 계속되거나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지속 나올 경우 북한 당국이 강도 높은 검열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