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도 ‘北 평화적 핵이용권’에 모호한 입장

“북한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의 모범 회원국이 되면 (핵의) 평화적 이용권을 갖는다는 이해할 만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고, 언제 그렇게 될 수 있느냐이다. 우리는 북한이 NPT하에서 그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다는 게 아니다. 북한이 꼭 그 권리를 행사해야 되겠느냐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동영(鄭東泳) 통일장관과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국무 차관보의 말을 섞어 놓은 말이 아니다. 힐 차관보 한 사람이 6자회담이 진행중이던 지난달 29일 베이징(北京)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 말이다.

당시 일부 외신은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에 대한 “조건부 허용 시사”라고 전했고,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은 “민수용 핵프로그램도 허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힐 차관보 스스로 모순되는 듯한 이같은 말을 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한미간 차이외에 이 문제 자체의 미묘함과 복잡함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 한미 “경수로 불가” 일치 = 신포 경수로를 북한이 포기해야 한다는 데는 한미 양국의 입장이 일치한다.

다만 정 장관이 “우리 입장에선 경수로를 짓는 것은 일반적 권리로서 북한의 권리다. 이는 미국의 입장과 다른 것이다”라고 말해 한미간 정면 충돌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미국의 기술과 주로 한국의 자금 지원으로 추진돼온 신포 경수로 대신, 북한이 독자적으로, 혹은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전력수요를 충당할 만큼의 경수로를 실제 건설한다는 것은 자금과 기술, 건설 기간이라는 측면에서 비현실적이다. 정 장관의 ’경수로 권리’ 언급이 원론적인 수준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힐 차관보는 10일 기자회견에서 “언론이 간과한 것은 어느 나라도 경수로를 건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경수로는 수십억달러가 드는 값비싼 사업이다. 그때문에 경수로가 지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힐 차관보는 경수로를 “이론적인 전력 자원(theoretical sources of power)”이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이론적인 전력 자원보다는, 당장 급선무인 어떻게 주민들에게 전력을 공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얘기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대북 전력 지원은 북한의 수요를 상당히 충족할 정도의 양(量)인 데다 2년반, 길어야 3년 걸리는 매우 신속한” 방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힐 차관보의 이같은 말들은 베이징 회담 때 북한과 양자협의에서 북한을 설득하는 논리로도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 발표문 초안 NPT ’의무와 권리’ 명시 = 6자회담이 휴회에 들어가기 전 중국이 제시한 공동발표문 제4차 수정초안엔 “북한이 NPT에 재가입하면 NPT 회원국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는 문구가 들어갔으며, 이에는 미국도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소식통은 지난 8일 이같이 밝히고 미국으로서도 국제법 규정 자체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다만 북한의 약속위반 전과기록을 들어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북한과 쟁점이 됐다.

특히 북한의 복귀시 권리는 의무를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곳곳에서 (평화적 이용을) 사실상 차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다른 외교소식통은 지적했다.

미국은 북한이 “기존의 모든 핵프로그램을 폐기하고 NPT에 재가입해 국제사찰을 받는 등 의무를 다하면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했을 때”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북한 대표단이 이같은 메시지를 지도부에 어떻게 전하고 지도부가 어떻게 대응할지가 주목된다는 것.

◇ 미 ’장래 이용권’엔 모호 = 미국은 그러나 공개언급에선 북한의 기존 핵프로그램 폐기와 “경수로 지원은 없다”는 점만 강조하고, 미래 평화적 이용권 문제에 대해선 언급을 않고 있다.

힐 차관보도 10일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NPT에 복귀한 후 문제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은 6자회담 의제외라는 입장으로 직답을 피해가고 있다.

그는 10일 기자회견에서 6자회담의 초점은 “북한의 핵프로그램 해체와 NPT 복귀, 경제및 에너지 지원”이며 평화적 핵이용권은 “잘못된 주제”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북핵 문제가 또 몇해만에 재부상하는 것은 안된다는 점이다… 북한의 핵 무기 제거에 초점을 맞추는 게 매우 중요하다. 북한의 궁극적인 열망, 즉 핵에너지 생산국 지위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은 중요성이 덜하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핵에너지 생산국으로서 지위로 복귀’라는 우회적 표현을 쓰긴 했지만, 평화적 핵 이용권을 원천 부인하지는 않은 셈이다.

다만 현 단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을 피하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경수로 문제나 핵의 평화적 이용권 문제가 불거지면, 핵의 이중 용도때문에 결론없이 무한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경수로가 중수로보다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앞서의 한 소식통은 11일 미 정부 관계자들도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을 “영원히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는 질문에 사람마다 “그렇다”와 “신뢰회복 때까지”로 대답이 엇갈리는 등 애매모호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 경수로 ’진짜’ 쟁점 아닐 수도 = 힐 차관보는 “이른바 (핵의) 민간 용도 문제가 유일한 쟁점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A,B,C 이슈 가운데 C에 불만이면서도 B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지난 8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미 당국자의 말을 빌려, “북한 대표단은 미국이 반대할 수밖에 없는 요구 조건을 내걸어 휴회 분위기를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경수로가 실질 쟁점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힐 차관보도 10일 기자회견에서 휴회를 요청한 것은 북한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의 발언으로 경수로 문제에 대한 한미간 ’입장차이’가 부각되기 전 이미 반기문(潘基文) 외교장관과 송민순(宋旻淳) 차관보도 인터뷰 등에서 정 장관과 유사하게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었다./워싱턴=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