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원칙합의-조건협상 전술로 개가”

6자회담 공동성명에 소위 ‘원칙합의 전술’로 부르는 북한의 협상 행태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는 남북대화 전문가들의 분석이 제기됐다.

‘원칙합의’ 전술은 일단 원칙부터 합의한 뒤 이후 합의에 대한 해석을 두고 시간을 끌어 협상 진전을 막는 전술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북한의 협상행태는 이같은 북한의 전술이 그대로 드러나는 과정이 될 것으로 보았다.

송영대 전 통일부 차관은 “북한은 과거 남북대화에서도 ‘원칙합의’ 전술을 반복해 왔다”면서 “회담의 원칙을 우선 정하자고 한 뒤에 나중에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상대방에게 수용할 것을 주장해왔다”고 말했다.

송 전 차관은 “북한이 합의문 해석을 두고 (참가국들과)다른 소리를 하면서 지연전술을 사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면서 “북한은 핵 보유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대북제재 피하기와 경제지원에 6자회담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진단했다.

북핵 전문가 김태우 국방연구원 군비통제 연구실장은 “북한이 지연전술을 쓰면서 사찰을 받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상황에서 북한 핵무기 보유고가 늘어나면 미국도 특별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원칙합의’ 전술은 20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경수로를 제공받는 시점을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이전으로 분명히 못박은 것이다.

북한이 공동성명의 우호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면서까지 경수로 문제에 선을 긋고 나오자 과연 북한이 합의 이행 의지가 있는지에 회의적인 시각이 늘고 있다.

북한은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고립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깨고, 한국과 중국을 등에 업고 미국을 공격했다. 결국 체제보장과 경제지원 외에 비록 적절한 시기의 논의 차원이지만 경수로까지 선물로 받아갔다.

북한이 원했던 것은 대부분 합의문에 포함됐다. 그럼에도 공동성명 채택 바로 다음날 합의에 초를 치고 나온 것은 일단 先 핵 포기와 NPT, IAEA의 조속한 복귀를 거부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 포기 결단을 내렸는지의 여부를 이번 성명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언론이 앞장서서 ‘북핵 타결’이라는 보도를 내자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고 반응했다. 구체적인 이행 합의서를 위한 본격 협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20일 북한 외무성 담화는 이러한 전망에 설득력을 높여 주었다.

북한이 이번 협상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시간 벌기’로 볼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 재임기간 3년을 버티겠다고 말했다. 핵 협상을 포스트 부시 시대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조건협상 전술’도 포함

경수로 논란은 ‘평화적 핵 이용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핵 폐기 요구를 버티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줄 수 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2003년 공사가 중단될 때까지 9년 동안 공사는 30% 정도밖에 진척되지 않았다. 건설을 재개해도 완공까지는 최소 6년이 걸린다. 신형 경수로를 건설하려면 이와 같은 과정을 또 다시 거쳐야 한다.

북한이 경수로를 제공해야 NPT에 복귀하겠다는 것은 결국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스스로 핵 폐기 의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결국, 6자회담 합의문에 따른 체제보장, 에너지와 경제지원은 계속 받으면서 핵 폐기는 차일 피일 미루겠다는 속셈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 폐기 조건을 번번이 갈아치우는 ‘조건협상’ 전술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고 분석한다. ‘조건협상’ 전술은 회담이 시작될 때 조건을 걸고 수용되지 않을 경우 회담을 결렬시켜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덮어 쒸우는 것을 말한다.

2002년 북한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존재 시인으로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자 북한 외무성은 10월 25일 성명을 내고 ‘자주권 인정과 불가침 확약’을 핵 폐기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2003년 8월 1차 6자회담에서는 포괄적인 적대정책을 변경하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6월 열린 3차 회담에서 북한은 미국이 대북 보상 및 에너지 지원에 참여하면 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2.10 핵 보유 성명 이후 ‘군축회담’을 주장했고, 7월 재개된 4차 회담 기조연설에서 김계관 북측 수석대표는 “핵 위협이 제거되고,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면 핵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후에는 관계정상화와 평화체제까지 들고 나왔다. 그리고 4차 회담 막바지부터는 평화적 핵 이용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2단계 회의부터는 경수로 제공 문제로 난항을 거듭했다. 북한은 이제 경수로 제공 시점을 문제삼고 있다.

조건부 핵폐기는 핑계거리

북한이 이처럼 상대방이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고, 또한 이를 밥 먹듯이 바꾸는 것은 조건에 진정성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합의 이행을 늦추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이번 합의를 통해 남한의 친북세력이 상당한 정치적 이득을 보게 됐다”고 했다. 6자회담 과정에서 북한 김계관 부상은 송민순 차관에게 “우리는 한 배를 탔다”고 언급했다. 남과 북의 공조는 미국을 고립시켜 북한이 경수로 이권을 챙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번 공동성명은 노무현 정권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나왔다. 성명이 발표되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노대통령은 20일 “기분 좋은 날이다”고 했다. ‘북한 정권과 남한 정권은 한 통속’이라는 말이 별로 이상하게 틀리지 않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번 공동성명은 남한 정부와 여당을 측면 지원한 효과도 충분히 거두었다. 여권의 유력한 대권 후보로 꼽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 면담에 이어 6자회담 공동성명의 최대 수혜자로 떠올랐다. 6자회담이 단순한 핵 폐기 협상이 아닌 정치 회담 성격이 짙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 핵포기 결단 아직 못 내려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 의지는 조건 없는 핵 폐기 단계로 이행하는 ‘행동’으로 확인될 수 있다. 여기에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인정과 NPT 복귀 후 IAEA 추가의정서(Additional Protocol) 체결을 수용하느냐 여부로 판가름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공동성명 발표 하루만에 선 경수로 제공이라는 조건을 달고 ‘버티기’로 나가고 있다.

북한은 핵을 통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고 공조를 굳건히 했다. 또한 적국(敵國)으로 간주한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과 평화협정 논의까지 얻어냈다.

이번 공동성명은 이러한 전략에서 나온 제재 피하기와 시간 끌기, 에너지와 경제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북한의 의도에 듬뿍 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북한은 향후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5차회담부터 지연전술로 나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부시 행정부 임기가 만료되는 시기까지 북핵 문제를 끌다가 미국의 차기 정부와 새로운 협상을 시작한다는 구상을 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남은 협상은 이것을 확인해주는 과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