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바이든 정부가 4월 30일(현지시간) 대북정책 검토를 마쳤다고 선언하자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북한의 김여정, 권정근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 외무성 대변인이 탈북민 대북전단살포, 바이든 의회연설, 북한인권문제 거론 등을 빌미로 강경한 논조의 대남-대미 비난성명(5.2)을 일제히 쏱아냈다.
“우리는 남쪽에서 벌어지는 쓰레기들의 준동을 우리 국가에 대한 심각한 도발로 간주하면서 그에 상응한 행동을 검토해 볼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김여정)
“확실히 미국집권자는 지금 시점에서 대단히 큰 실수를 하였다. 미국의 새로운 대조선(북한) 정책의 근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선명해진 이상 우리는 부득불 그에 상응한 조치들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권정근)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그런데 급반전이 일어났다. 생뚱맞게도 김정은은 3일후 리설주를 비롯 측근들을 대동하고 군인가족예술소조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노동신문은 관련소식과 사진으로 1면을 장식했다. 극장국가(Theatre state)의 지도자다운 연출의 기운이 역력했다. 김일성 생일 경축 예술공연(4.15)에서 앵콜을 외치며 열광하던 모습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특별한 계기도 없었는데, 연이어 1호 예술행사가 기획된 것은 매우 특이했다. 숨은 목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가 김정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주목하고 있을 때, 일상과 예술을 즐기고 참석자들을 격려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나는 평화지도자, 인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내외에 부각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일주일여가 다시 지나고 있는데, 북한은 조용하기만 하다.
김정은의 고민이 길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도발 직전의 폭풍전야일까? 아마 두 가지가 다 맞을 거 같다. 신형전략무기 도발은 오랫동안 준비해 오고 있는 비장의 카드이다. 그리고 바이든이 천명한 ‘단호한 억지와 외교’ 노선에 대해서는 외무성 차원에서 원론적인 초동대처를 했다. 그러니 이제는 지켜보며 강·온 전술을 보다 정교히 가다듬고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김정은도 올해 초부터 계속 숨가쁘게 달려왔다. 아니 2019년 2월 하노이 외교 대참사 이후 계속 망령에 시달려 왔다고 할 수 있다. 8차 당(黨) 대회를 비롯 당정군 회의를 진두지휘하면서 내부 단도리에 총력을 경주해 왔다. 얼마 전에는 ‘고난의 행군’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는 최후의 승부처(고비)라고 할 수 있는 오는 21일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선(先) 전략무기 도발(초강경책)을 포함한 국면 주도책을 점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4주년 기념 기자회견(5·10)을 통해 북한에게 다시 한 번 대화 복귀를 촉구하였다.
“한반도에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여는 것은 8천만 겨레의 염원입니다. 남은 임기 1년, 미완의 평화에서 불가역적 평화로 나아가는 마지막 기회로 여기겠습니다. 북한의 호응을 기대합니다”(모두 연설), “북한의 이런저런 반응이 있었지만, 그 북한의 반응이 대화를 거부한 거라고 생각 안 한다”(질의응답)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보였다. 지난 2년여 북한의 형언할 수 없는 갖은 막말을 참아내는 모습은 애처로움을 넘어 화가 나기까지 했다. 이번 회견에서도 대통령은 대화와 평화만 줄곧 강조했다. 김정은이 년초에 ‘핵을 통한 통일’을 당규약에 삽입한 후 신형 전략미사일을 과시하고 시험하고, 말폭탄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게 대한민국 국정 책임자로서 맞는 행동일까?
얼마 전 발표된 바이든의 대북정책 기조에 대해서도 “싱가포르 선언의 토대 위에서 외교를 통해 유연하고 점진적·실용적 접근으로 풀어나가겠다는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을 환영한다”며 외교에 방점을 둔 것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어 걱정스럽다.
물론 대북정책 기조를 수립하는 과정에 한미가 협의하는 과정을 거쳤겠지만, 바이든이 공식적으로 밝힌 기조는 북한 핵·미사일을 “미국과 세계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동맹과 함께 “단호한 억지와 외교”로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일 정상회담(4·16)과 G7 외교장관회담(5·5)에서의 한반도 문제 관련 언급 내용도 ‘외교’는 물론이고 ‘억지’ 쪽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다.
“우리는 북한이 도발적 행동을 자제하고 비핵화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외교적 절차에 착수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여전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이 모든 불법 대량파괴무기(WMD)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도록 폐기해야 한다는 목표에 전념할 것이다”(G7 외교장관회의 공동성명)
한발 더 나아가, 문 대통령은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의 6·12 싱가폴 미북정상회담 합의를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바이든이 ‘先 신뢰구축(제재 해제) 後 비핵화 노력’을 기조로 한 트럼프-김정은 간의 잘못된 6·12 합의를 계승할 것이라는 판단은 너무 안이하고 자의적인 평가가 아닐까?
김정은의 목표는 ‘핵있는 북한’이다. 바이든은 완전한 비핵화를 강조하면서 그 수단으로 ‘단호한 억지와 외교’를 얘기했다. 행간을 읽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오직 한가지, 외교만을 강조했다. 북한의 핵은 우리의 머리맡에 와 있고, 바이든의 무게추는 동맹과 억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제정치에서는 외교도 억지의 중요한 한 축이다. 실제로 바이든은 취임 후 군장성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외교관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남은 1년이 북핵 문제는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남북 간 대화와 교류협력, 물론 당연히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이 대화로 다시 나오더라도 전술적 계산이 깔려있는 행동, 문 정부를 원포인트로 이용만 하려는 속셈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늘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바이든이 북한 문제보다 경제 등 국내문제, 미중패권경쟁·신안보위협 등과 관련해 보조 맞추기, 공동대응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시기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북한 문제도 대중국포위망 구축의 틀 속에서 고려할 가능성이 크다. 형이 힘들어할 때는 동생도 요구만 하지 말고 도와주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진정한 형제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맞다. 그러나 그 뜻이 옳아야 한다.
김정은은 지난 4월 초 당세포비서대회 연설을 통해 ‘고난의 행군’ 정신을 다시 꺼내 들었다. 4월 말에는 청년동맹 10차대회에 보낸 서한을 통해 “앞으로 15년 안팎에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겠지만, 쉬운 길을 마다하고 주민을 볼모로 하여 자신의 대전략과 장기구상을 실현해 나가려 하는 승부사, 독재자의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가 아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북한의 핵-미사일이 우리의 머리 위로 날아들 수 있다. 위기의 시대다. 안이한 판단은 국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치밀하게 준비·대응해야 한다. 김정은을 선의로만 대하거나, 가볍게 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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