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도 알다시피, 북한은 소(러)일전쟁이 종료되고 미일 간의 헤게모니 다툼의 과정속에서 건국된 나라다. 1945년 8월 일본이 미국의 핵공격을 받고 무조건 항복하면서 소련은 조선반도 북반부를 점령했다. 8월 15일에 쇼와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는데, 이 날을 남과 북에서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은 대일(對日) 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미미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북한 매체는 모든 동맹국의 역할을 인정했는데, 김일성은 첫 신년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소미중영을 선두로 한 민주국가의 위대한 승리로 결속을 지였다”며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했다. 이후 북한은 이 문장을 “제2차 세계대전은 쏘(소)련을 비롯한 민주진영의 승리로 종결되였다”로 바꿨고 1946년 이후 8월 15일마다 북한매체에서 ‘일제로부터 조선을 해방한 소련군에 대하여’라는 글이 소개됐다. 김일성과 김두봉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이 소련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는 내용도 소개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감사의 열정은 식게 된다. 1960년대에 기사 제목에서 ‘소련군’이라는 문구는 사라졌고 항상 언급되던 김일성과 소련 최고지도자 초상화의 사진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6년에 노동신문은 아직 “우리 인민은 쏘련 인민과 그 영웅적 무장력이 일본제국주의를 격멸하고 우리나라를 해방한데 대하여 잊지 않고 있다”고 소련을 미화했다. 그런데 노동신문 기억력은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해, 즉, 1967년에는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노동신문은 소련군대보다 “항일 유격대”가 광복에 기여한 측면이 크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후 조작된 이 이야기는 북한의 공식 역사관이 됐다.
노동신문이 갑자기 소련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김일성과 그의 유격대만 찬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66년 8월과 1967년 8월 사이 발표된 자료에 찾을 수 있다. 바로 ‘5·25 교시’라고 부르는 이 지시로 인해 북한 역사의 크나큰 왜곡을 불러오게 된다.
‘5·25 교시’는 김일성이 1967년 5월 25일에 한 연설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단, 김일성이 같은 날에 두 개의 연설을 했는데,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은 공개됐지만 ‘당면한 당선전 사업방향에 대하여’라는 연설은 공개되지 않았다. ‘5·25교시’는 공개되지 않은 ‘당면한 당선전사업방향에 대하여’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이 자료의 전문을 아직까지 보지 못해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것만 알고 있다. 주요 내용은 김일성이 갑산파를 비난하면서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자라는 것이다. 유일사상체계는 북한 모든 사회를 김일성화하는 즉, 김일성식 독재시스템의 근간이다.
1956년에 흐루쇼프가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난하면서 김일성도 개인숭배에 대해 다소 자제를 하게 되지만 ‘5·25교시’ 발표 이후에는 아주 특이한 개인숭배가 본격화된다. 이 새로운 개인숭배는 스탈린주의보다 훨씬 극단적이었다. ‘당면한 당선전사업방향에 대하여’는 공표돼 북한에서 성분제도와 여행증 제도와 교육에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님의 어린 시절’ 등의 과목도 신설됐다. 그리고 북한은 도서관에 있는 소련 포함하여 외국 문헌을 모조리 없애, ‘소련색’ 빼기에 나서게 되다.
1967년부터는 북한 당국의 역사 왜곡은 더욱 노골화된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주요 인물은 모두 김일성으로 채워진다. 새로운 역사관에 따라 대일전쟁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의 역할은 평가절하된다. ‘일제놈’들을 쳐부순 세력은 바로 “조선 역사상 위인 중에 위인이시며 강철의 영장이시며 전체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신 김일성 원수님과 그이께서 세우신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선전하게 된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이 어릴 때부터 광복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의 부모인 김형직과 강반석은 항일운동의 지도자였다고 가르친다.
다음은 ‘김일성 동지 전략’이라는 북한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1920년 ‘어버이 수령님’은 만주로 이주하였고, 1932년에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군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항상 일본의 황군과 만주군을 공격하고 만주항일운동의 주도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1945년에 나치 독일의 항복해 ‘위대한 원수님’은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총공격전”의 계획을 만들었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 김일성동지께서는 1945년 8월 9일 전체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및 병사들에게 일제를 패망시키고 조국의 해방을 실현할 데 관한 전투명령을 내리시였다.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내리신 전투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소련 군대와 함께 일제의 이른바 ‘난공불락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적을 격멸소탕하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물론 위와 같은 문서들은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는 날조다.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에서 황군과의 싸운 세력은 소련군뿐이었다. 소일전쟁 때 붉은 군대 대위인 김일성은 소련에 있었고, 전쟁에서 참가하지 않았다.
북한은 김일성이 1945년 소일전쟁 발발 이전에 모스크바에 방문했고 안드레이 즈다노프 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을 비롯한 소련 최고 엘리트와의 만났다고 선전한다. 그리고 즈다노프와 대담시 김일성은 소련군대가 조선인민혁명의 도움이 별로 필요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게다가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는 김일성이 “소련군대가 라진에 진출했을 때 도시는 이미 해방된 뒤였습니다”고 하였다.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현재도 이 같이 날조된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대일전쟁은 ‘수령님’의 영웅적인 전투로 보여주고, 소련의 역할은 완전히 부인하지 않지만, 중요한지 않은 것으로 선전된다. 북한의 질서나 사상 제도 등 기본적인 것은 바로 김일성에 의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의 위대성을 부인하면, 김정일, 김정은, 당, 국가 등 북한의 모든 것은 합법성을 잃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북한에는 진실을 알고 있는 주민들이 있다. 전쟁 전후(戰後) 소련 원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고, 이 사람들은 국가의 왜곡·날조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준 소련 사람들에 대하여 감사를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