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만약 인민의 지도자를 지향했다면?

1945년 8월 중순, 소련이 조선반도를 점령하자 일제 총독부 신문 발행이 중단됐다. 몇 개월 동안 한반도 북부에 소련 붉은 군대의 기관지 ‘조선신문(朝鮮新聞)’ 이외 다른 신문을 발간되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난 11월 1일부터 북조선 공산당 북부 기관지 ‘정로(正路)’가 발간되기 시작했다. 1946년 9월 조선공산당이 김두봉의 조선신민당과 통합돼 ‘조선로동당’ 개명되면서 정로는 ‘로동신문’으로 바뀌게 됐다. 소련 점령기 초기 비공식적인 기관지인 정로를 통해 당시 김일성이 권력을 잡아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945년 말기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일제의 항복으로 한국은 독립했지만, 연합국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반도에 통일된 국가가 탄생될지 미국과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 각각 성격이 완전히 다른 국가가 탄생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로를 통해 당시의 혼란한 정국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정로의 기사들은 확실한 규칙에 따라 쓴 것이 아닌 것 같다. 오타도 많았고, 현재의 북한 보다 외래어, 특히 일본어 통해 사용하게 된 영어 외래어를 많이 썼다. 특히 한자와 한글을 혼합해 사용해 가끔 ‘委원會'(위원회)와 같은 어색한 단어도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의 불확실성 측면이 있지만 당시 상황을 대변해 주는 정치적 확실성은 정로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이미 알려진바 대로 1945년 11월 소련 스탈린은 누구를 북한 지도자를 임명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정로에는 이와 관련 다양한 공산당 간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면, 창간호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박헌영 공산당 총비서를 찬양하는 “朝鮮無産階級(조선무산계급)의 指導者(지도자) 朴憲泳(박헌영)동무 萬歲(만세)”라는 표현이 나온다.

김일성에 대한 북한 신문이 처음 언급하는 날은 1945년 11월 7일이다. 이 날을 소련 사회주의 혁명의 기념일인데, 38선 이북(以北)에 붉은 군대와 스탈린을 찬양하는 데모가 있었는데, 데모의 리더중에 한명이 바로 김일성이었다. 정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끝으로 國歌合唱(국가합창)에 뒤니어(뒤이어) 金日成將軍(김일성장군)의 先道(선도)로 全世界被壓迫人民(전세계피압박인민)들의 解放軍(해방군)인 붉은 軍隊(군대) 萬歲(만세)! 偉大(위대)한 소聯(련) 人民의 名節(명절)인 十月(10월) 革命(혁명) 紀念(기념) 萬歲(만세)! 全世界弱小民族(전세계약소민족)의 最高(최고) 指導者(지도자)인 大元帥(대원수) 스딸린 동무 萬歲(만세)!”

보다시피, 김일성을 장군으로 소개했지만, 분명히 나라의 유일한 지도자로 선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김일성에 대한 표현도 격상되기 시작한다.

전환점은 1945년 12월 17일이었다. 그날 김일성이 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 되었다. 그 날부터 소련도, 정로도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보고 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12월 21일 ‘金日成(김일성) 동무의 빗나는 鬪爭史(투쟁사)’라는 기사가 나왔다. 다만 당시 정로에 찬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김일성이 아니고 스탈린이었고 김일성을 그의 제자로 소개했다.

1946년 1월 1일 김일성의 첫번째 신년사가 정로에 나왔다. 전문가들은 보통 신년사가 소련에서 비롯된 전통이라고 하지만, 당시 소련에서 신년사를 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고, 최고 소비예트(국회)의 위원장인 미하일 칼리닌이었다. 명목상 소련 국가원수인 칼리닌은 실권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당시 북한에서 국회와 같은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 북부의 책임비서인 김일성이 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第二次世界大戰(제2차세계대전)은 蘇米中英(소미중영)을 先頭(선두)로 한 民主國家(민주국가)의  偉大(위대)한 勝利(승리)로 結束(결속)을 지였다”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김일성이 미국이나 영국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유일한 말인 것 같다. 냉전이 시작해 북한 당국은 이 문장을 “제2차세계대전은 쏘련을 비롯한 민주진영의 승리로 종결되였다”로 바꾸고 ‘김일성전집’ 등에서는 왜곡 조작된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신년사 텍스트에는 소련 국장과 비슷한 그림이 있었다. 그림 안에 한반도의 모습이 표시되고 양쪽에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통일 한국의 국장 프로젝트였는가? 아마 우리는 절대 알지 못 할 것 같다.

1946년 2월 8월 김일성이 소련 지배하의 북한 임시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됐고 조선신민당의 주석인 김두봉은 부위원장이 됐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당의 북부뿐만 아니라, 정부의 지도자도 추앙받게 된다. 당시 정로를 보면 김일성뿐 아니라 2월 1일 ‘金枓奉(김두봉)의 鬪爭史(투쟁사)’와 같은 김두봉에 대한 찬양기사도 나왔다.

1946년 3월 1일 김일성은 3·1운동 기념사를 발표했다. 물론 내용은 현대 북한에서 가르치는 “경애하는 수령님의 아버님인 김형직 동지가 3·1인민봉기의 령도자이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보다 일본 식민지 정부에 반대한 조선인민을 찬양하는 것뿐이었다.

4월14일 정로는 김일성의 ’20개의 정강(政綱)’이 발표됐다. 이 텍스트를 살펴보면 김일성이 자신을 조선 사람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반동분자’ ‘반민족분자’와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나중에 북한 ‘김일성 장군노래’를 통해 ’20개의 정강’에 영원성을 부여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에는 “20개 정강우에 모두다 뭉쳐” “북조선 방방곡곡 새봄이 온다”는 대목이 나온다.

5월부터 김일성은 정로에서 스탈린보다 더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1946년 5월 17일 정로는 발표한 구호 중에 “朝鮮民族(조선민족)의 偉大(위대)한 指導者(지도자) 金日成委員長(김일성위원장) 萬歲(만세)!”라는 찬양글은 “朝鮮人民(조선인민)의 眞正(진정)한 벗이며 恩人(은인)인 쓰딸린 大元帥(대원수) 萬歲(만세)!”라는 글보다 먼저 나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런 구호 순서가 의미 없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5월 17일을 또 하나의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김일성은 지금 북한의 절대권력자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50년 최용건 대신에 북한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1956년에는 최창익 비롯한 반대파를 숙청했다. 1967년에는 빨치산 출신 동료들을 숙청하고 개인숭배를 시작했고 현재와 같은 독재체제로 전락했다. 역사에서 만약은 없다지만, 김일성이 만약 절대권력자가 아닌 초기 정로가 소개했던 것처럼 인민의 지도자가 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확실한 건 김정은 정권은 없었을 것이다. 현재 수령독재체제에서 억압받고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역사에서 ‘만약’이 던져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