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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추석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첫날 ‘특수 이산가족’이란 이름으로 국군포로 1가족과 납북자 2가족이 감격적으로 만났다.
국군포로 이쾌석(79) 씨는 남한의 동생 정호(76), 정수(69) 씨와 1987년 납북된 ‘동진27호’ 선원 노성호(48) 씨는 남측 누나 순호(50) 씨, 역시 동진호 선원이던 진영호(49) 씨도 누나 곡순(56) 씨를 각각 상봉했다.
22년만에 만나게 되는 동진호 납북자 성호 씨와 누나 순호 씨는 만남이 이뤄진 순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나는 “너무 반갑다. 너무 보고 싶었다”고 입을 열자, 동생은 “여기와서 장가도 가고 대학도 가고 이렇게 잘 살고 있다”며 “내가 여기 와서 대학 다닌다고 하면 거기서 알고 있던 사람들 믿지도 않을 것”이라고 누나를 안심시켰다.
그는 평양에서 어엿한 직장도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누나는 “잘됐다. 잘 되어서 있으니깐 흐뭇하다”고 답했다.
성호 씨와 함께 상봉행사에 참석했던 북측 가족 윤정화(44) 씨와 딸 충심(21) 양도 함께 했다.
누나 노 씨가 동생을 보며 부모없이 자라서 힘들게 컸다며 눈물을 흘리자, 윤 씨는 “사위 셋이 당원이기도 한데, 우리 부모님들이 남편, 막내 사위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딸 충심 양은 “오랫만에 만났으면 웃음이 나와야지 울음이 나와서 되겠느냐”며 웃으며 고모의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누나 노 씨는 조카인 충심 양을 보며 “아빠 닮아서 예쁘게도 생겼네”라로 환하게 웃었다.
순호 씨는 “(동생이 북에서) 혼자 어떻게 살까 걱정했는데, 북한에 있지만 처자식과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고 말했다.
‘동진27호’는 인천에서 출항했다가 1987년 1월 15일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 중 나포됐다. 당시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1월 15일 오전 11시 43분경 우리나라(북한) 서해 장산곶 서북쪽을 불법 침입한 남조선 선박 1척을 단속했다”고 밝혔다.
북한적십자사는 납북된 지 6일만에 ‘동진27호’ 송환의사를 밝혔으나 김만철씨 일가족 탈북사건으로 무산됐다. 이후 북한은 ‘동진27호’ 선원들이 ‘의거 입북자(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북한에 남은 자)라며 송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된 형을 찾기 위해 입대 12년간 군생활을 한 동생 이정호(76) 씨와 국군포로가 된 형 이쾌석(79) 씨도 이날 형제상봉했다.
장남은 이쾌석 씨가 1950년 가족들과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가 징집돼 전쟁터로 나가 실종된 지 59년만의 만남이다.
가족들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0년 쾌석 씨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다. 죽은지 알았던 큰 형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동생 정호 씨가 정부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불과 3개월 전인 올해 6월이다.
형제애가 남달랐던 정호 씨는 전쟁터에서 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1952년 자원입대해 형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1963년까지 12년간 군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민간인 신분보다는 군인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형 소식을 수소문 하는데 좋다는 판단 때문이다.
정호 씨는 가슴에 대못이 박힌 채 평생 큰 아들을 그리워하다 형의 생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돌아가신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진다고 했다.
쾌석 씨는 정호 씨가 고향 선산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셨다는 말을 듣고 “잘했다. 나는 너한테도 죄를 짓고 부모님한테도 죄를 지은거지”라며 눈물을 흘렸다.
쾌석 씨는 “나는 어미니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면서 “이제 너를 만나 너무 기쁘니 눈물도 나지 않는다. 나도 솔직히 부모 친척, 형제도 없이 나 혼자 이 곳에 와서..”라며 그 동안의 일이 떠오른 듯 말을 잊지 못했다.
쾌석 씨는 또 동생 정호 씨가 어떻게 북한까지 가게 됐는지를 묻자 “징집돼 군대에 갔다가 이 곳에 왔다. 그래도 이 곳에 와서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고 아픈 곳이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답했다.
정호 씨가 함께 상봉행사에 참여한 넷째 동생 정수(69) 씨도 형 쾌석 씨의 딸 경숙(49), 아들 경주(43) 씨에게 남쪽에 있는 가족들의 가계도를 직접 그려보이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포함, 가족 모두를 소개했다.
정수 씨는 형 쾌석 씨에게 “형님 군대갈 때 내가 3살이었는데, 나 기억나요? 형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며 형을 안았다.
또 다른 동진호 선원 진영호 씨도 남한 누나 곡순 씨를 만났다.
영호 씨는 줄곧 담담한 표정이었고 대화는 주로 영호 씨의 북한 아내인 안금순 씨와 딸 진선미 양이 이끌었다.
안 씨는 “아버지(김일성)와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아무리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더라도 걱정 없이 살았다”면서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잘 살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봉행사 동안 안 씨는 수차례 이같은 말을 반복했다.
영호 씨는 상봉 한 시간쯤 지나자 긴장이 풀린 듯 대화에 동참했다. 영호 씨는 “남에서 나쁜 일을 저질러 경찰을 피해 배을 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남조선에 있었으면 장가나 가고 집이나 있겠느냐”고 말했다.
곡순 씨는 남한 신문에 실린 영호 씨 기사를 보여줬고, 매형이 쓴 편지도 전달했다.
영호 씨 아내 안 씨가 “남자다워서 어렸을 때 (영호 씨가) 주먹깨나 썼겠다”고 말하자 누나는 “영호가 어렸을 때 노래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많은 이들이 좋아했다”면서 “(동생을) 외롭지 않게 잘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상봉을 마친 곡순 씨는 “동생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다만 시력이 떨어져 딸 선미 양이 편지를 대신 읽었다.
곡순 씨는 이어 “납북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야기 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영호 씨는 22살의 아들과 19살의 딸, 1남 1녀를 두고 있고,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에 거주하며 섬유공장에 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곡순 씨는 영호 씨와 만남을 위해 2000년 8월 15일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상봉신청을 했으나 북측의 거부로 만나지 못해 왔다. 곡순 씨는 2002년 아시안게임 때는 플랜카드까지 만들어 북측에서 온 응원단에 호소하기도 했다.
한편, 이번 상봉행사의 최고령 상봉자인 정대춘(95) 할아버지도 북측 아들 완식(68) 씨와 감격스럽게 만났다.
대춘 씨는 고향인 황해도 평산과 서울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중 전쟁으로 북한의 아들 2명과 딸과 헤어져 소식을 끊겼다. 60년만에 아들을 만난 대춘 씨는 “이제 한을 풀었다”고 감격스러움을 표현했다.
남측 아들 태근(48) 씨도 “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자식을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면서 “10년전부터 ‘정대춘’으로 상봉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이번에 북한에게 쓰던 이름인 ‘정운영’으로 신청하자 상봉에 선정됐”고 말했다.
대춘 씨는 북측 가족 중 막내 아들인 완식 씨를 빼고 전부 사망했다는 소식에 낙담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완식 씨가 지난해부터 신경에 이상이 생겨 연신 손을 떨자 안쓰러워했다. 북측 손자 명남 씨는 처음 본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치료를 받고 있다”며 안심시키려 했다.
대춘 씨는 “나보다 젊은 애가 이게 무슨 일이냐”면서 “(아버지를 찾으려고) 너무 생각했구나”하고 연신 아들의 손을 쓰다듬었다.
이날 남측 이산가족 97명은 북한에 살고 있는 가족 228명과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이명박 정부들어 첫 이산가족 상봉행사인 이번 만남은 1년 11개월만에 재개된 것이다.
1차상봉 첫째날 단체상봉을 한 이산가족들은 이날 금강산호텔에서 북측이 주최하는 환영 만찬을 갖고, 27일 오전에는 금강산호텔에서 개별 상봉을 한다. 오후에는 온정각 앞뜰에서 야외 상봉행사를 갖는다.
28일 금강산호텔에서 작별 상봉을 한 뒤 돌아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