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時 김정일 도피 ‘은폐도로’ 아시나요?

▲ 유사시 김정일의 도피루트. 평양에서 북신현까지는 철도이용

평안북도 창성군과 향산군 사이에 일명 ‘은폐도로’라는 길이 있다. 일반인들이 쓰지 못하게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는 비밀도로다. 향산군 북신현리로부터 시작되어 약 120km 길이다.

‘은폐도로’는 1987년부터 1996년까지 3단계에 걸쳐 완성됐다. 이 도로는 김정일의 지시로 전쟁에 대비, 김일성 김정일과 일가족들이 안전하게 중국으로 도망가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나는 만 2년간 도로 건설에 참가했다.

당시 평안북도 당 조직비서 김평해는 평북도내 각 시, 군 공장기업소, 협동농장들마다 ‘속도전 돌격대’를 조직, 현지 도로 건설에 동원시켰다. 1단계 도로공사는 일방통행 1차로로, 폭이 3m 정도였다. 구불구불한 곡선을 자연의 생김새에 맞게 그대로 살려 유사시에 공습을 피하기 쉽게 만들었다. 그러다 도로폭이 너무 좁다고 하여 김정일은 차 두 대가 지나갈 수 있게 넓히라고 지시했다.

2단계 공사의 기본과제는 도로폭을 9미터로 늘이는 것이었다. 물론 강기슭을 따라 건설했기 때문에 굽이가 많고 산을 오르는 언덕도 있어 차를 타고 자연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도로였다.

2단계공사가 끝나고 중앙당 조직지도부의 승인으로 도로완공 준공식의 테이프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성이 사망했다. 이때 창성별장에서 휴가 중이던 김정일은 이 소식을 듣고 ‘은폐도로’를 타고 1시간 40분만에 묘향산에 있는 김일성의 별장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김일성의 죽음을 본 김정일은 “도로만 잘되어 있어도 수령님 생존을 보았을 것 아니냐”며 홧김에 아랫사람들을 나무랐다.

이에 노동당 간부들은 “도로가 너무 구불구불하고 고속으로 달리는 데 위험하다”고 하면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들어놓은 도로를 다 까고 다시 직선으로 펴는 작업을 진행했다. 구부러진 계곡은 모두 다 파괴하고, 산을 깎아 낮추고, 강물 길을 돌려 곧게 펴서 3년간 시간과 노력을 투하해 최상급으로 완공했다

‘은폐도로’의 사용목적은 유사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김일성 김정일과 가족들이 중국으로 ‘탈환'(사실은 ‘도망’인데 ‘탈환’으로 표현한다)하기 위한 비밀통로다. 이 비밀루트는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향산군 북신현까지 가고, 그 다음에 자동차를 타고 이 ‘은폐도로’를 이용, 창성까지 일사천리로 빠져나간다. 그 다음에는 창성 약수리에 있는 김정일의 별장에서 압록강 밑으로 뚫려진 지하터널을 따라 신속히 중국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도로의 경계근무는 하루 24시간 호위총국(김정일 경호대)이 맡고 있으며 도로 구간마다 충성심이 높은 핵심계층들 중에서 뽑은 규찰대가 순시한다.

일년 내내 차 못다니고 김정일만 이용

도로는 일년 내내 김정일 자동차 외에는 그 누구도 운행할 수 없으며 아무리 고위간부라도 이 도로를 이용하다 발각되어 경비원들이 차 넘버를 적어 상부에 보고하면 그 사람은 즉시 실각 처리된다.

북한에서는 당의 유일사상체계(김일성 보위 사상체계)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김정일 보위사상체계)를 위해서는 사소한 불평이나 의견도 없이 무조건 관철해야 한다.

이른바 ‘모시는 사업’에서는 수만금을 들여서라도 무조건 만족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김정일이 만족하지 못하고 고치라고 하면 이유불문 뜯어고쳐야 한다. 변덕스러운 김정일 개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 북한인민이 합격될 때까지 해야만 한다.

은폐도로 건설에 북한인민들은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고, 공사자재를 턱없이 낭비했다. 북한에서는 김씨왕조의 안녕과 만족을 위한 일이라면 ‘기술경제 타산’이라는 경제용어가 통하지 않는다. 최상의 질이 보장되어야 하고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밖에 통하지 않는다. ‘은폐도로’ 건설도 그 전형적인 사례중 하나다.

지구상 마지막 군주독재국가, 김씨황실의 안녕은 언제까지 존속될 것인가?

한영진 기자( 평양출신 2002년 입국)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