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엽기 연쇄살인 ‘박명식 사건’ 아시나요?

▲화성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 한장면

10세 소녀들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조용한 세상’이 곧 개봉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남북한이 비슷하다. 그러나 연쇄살인처럼 지탄을 받아야 할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북한에서는 찾기 힘들다.

북한에도 굶어죽거나 보안원이나 보위원에게 맞아죽는 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도 원한이나 범죄, 연쇄살인 같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1990년 함경남도에는 남한의 영화보다 더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일이 있다.

1991년 10월 중순. 함경남도 신포시 재판소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피고인 박명식은 40대 남자로 12명의 생명을 앗아간 연쇄 살인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박명식은 1990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무려 12회나 살인을 저질렀다. 범행 대상도 대부분 14살부터 17살까지 청소년이었다. 범행방법도 엽기적이었다. 복부를 난자한 다음 장기를 적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범행수법도 잔인했지만, 수사에 나선 보안서(경찰서)가 제때 범인을 잡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나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점쟁이의 점괘가 부른 살인극

연쇄살인의 내막은 이러했다.

박 씨는 수년 전부터 간경화를 앓았다.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큰 병원과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 치료 받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박 씨는 평소 가깝게 지낸 직장 동료로부터 점을 잘 친다는 점쟁이 이야기를 듣고 소개를 부탁했다.

북한에서는 점쟁이나 종교행위에 대한 통제와 단속이 심하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를 못한다. 한 직장에서 여러 해를 같이 지내며 가까워진 박씨의 동료는 그를 믿고 점쟁이를 소개시켜 주었다.

점쟁이를 찾아간 박 씨는 자기가 지금 간경화를 심하게 앓고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호소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팔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끈질기게 매달리자 점쟁이는 거절을 못하고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며칠 후 찾아 온 박 씨에게 점쟁이는 사람의 간을 먹어야 간경화가 낳는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의 간이여야 더욱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박명식은 집에 돌아와 고민 속에 빠졌다. 소심한 성격이어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느냐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박씨는 직장 안에서도 조용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병세가 자꾸만 심해지니 박 씨 눈에 독기가 돌았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점쟁이 말이라도 해보고 죽자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박 씨는 봄철 농촌동원을 나온 중학생을 대상으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북한은 해마다 봄, 가을이면 고등중학교 3학년 이상 학생들을 협동농장 노력지원에 의무적으로 동원시킨다.

학생들은 봄철에는 보통 50~60일 정도, 가을철에는 20일 농촌동원을 나간다. 보통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하지만, 밤늦게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들은 농장원 가정집에 2~3명씩 나누어 잠을 자고 식사는 단체로 한다.

박명식은 낮에 학생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확인한 다음 범행을 계획했다. 농촌동원에 나온 학생들은 하루종일 일을 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으면 모두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든다. 학생들이 잠든 사이 밤 11시 경 숙소에 침입한 박 씨는 한 학생의 입을 틀어막고 준비한 흉기로 그 자리에서 급소를 찔렀다.

박씨는 피흘리는 학생을 숙소에서 안고 나오다 동네 개들이 짖어대고,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학생을 마당에 내려놓고 줄행랑을 쳤다.

흉기에 찔린 학생은 많은 피를 흘려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사망한 학생은 당시 고등중학교 4학년(15세)이었다. 며칠 후 살인사건이 일어난 농장에서 4km정도 떨어진 농장에서 또다시 학생이 납치된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 번째 시신은 농장원이 발견 당시에 기절할 정도로 복부가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신포시 보안서에서 수사를 했으나 범인을 잡는 데 실패했다. 보안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며칠 후 다시 신포 시내에서 20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역시 시신의 복부 부문이 훼손되어 있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신포시와 인근에서 10건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연쇄살인 사건이 계속되자 신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밤에는 다니지 못했다. 수사당국은 살인범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다. 한국은 현장조사와 유전자 감식 등 과학적인 방법이 동원되지만 북한에서는 주민의 신고나 현장의 증인이 없으면 수사가 진척되지 않는다.

당시 신포시의 당 책임비서는 중앙(평양)에 회의를 갈 때마다 ‘살인장군’이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10월 어느날 박명식은 추수동원을 나온 학생을 상대로 다시 살인을 저지르다 피해 학생이 소리치며 저항하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살인범 잡기에 혈안이 된 주민들이 낌새를 채고 도망가던 박 씨를 붙잡았다.

박 씨는 13번째 살인을 시도하다 주민들에게 잡히고 만 것이다. 주민들이 붙잡지 못했다면 그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을 뻔한 사건이었다. 박 씨가 체포된 후 그 점쟁이도 역시 보안서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은 북한사회에 은밀히 퍼져가고 있는 점쟁이들의 폐해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당국은 ‘자기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사상의 나라라고 떠들지만, 북한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 다니며 점괘에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북한 사회가 자주이니, 주체사상이니 떠들면서도 ‘사람의 간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허황된 점괘를 믿고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90년대 중반까지 주민들의 사고는 5, 6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주민들이 은밀히 점을 보는 현상은 먹고살기가 더욱 힘들어진 요즘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