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방북을 북한이 전격 불허했다. 북한이 방북을 최종 승인했다고 반 총장이 밝힌 지 하루만이다. 북한은 방북을 불허하면서 제대로 이유도 밝히지 않았다. 6.15 공동선언 15주년 행사를 남북이 공동개최하는 문제도 불투명한 상태다. 남북 민간단체들은 5월 초순 중국 선양에서 사전접촉을 갖고 서울에서 행사를 개최한다는데 합의했지만 이후 진전이 없다. 북한은 16일 발표한 6.15 북측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8.15 행사의 개최장소를 문제삼았지만, 장소 문제를 떠나 행사 자체에 별다른 열의가 없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희호 여사의 방북 문제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측은 당초 5월말 이희호 여사의 방북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구체적인 진전이 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최근 북한과 관련해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을 조망해보면, 북한이 전반적으로 대외접촉에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일을 벌이기를 상당히 꺼려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반면, 북한의 대외적 언사는 더욱 강경해지는 양상이다. 20일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 성명에서 핵무기 소형화를 언급하며 “함부로 도전하지 말라”고 경고했는가 하면, 같은 날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는 “미국이 북한을 자극할수록 북한도 미국을 더 아프게 자극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놨다. 21일 북한 적십자 중앙위원회 대변인 담화에서는 “동족끼리 오갈 수 있는 길부터 터놓으라”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다.
북한내 만연해지는 듯한 ‘복지부동’ 현상
대외적으로 강경한 말은 계속되는데 뭔가 일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복지부동’의 일환으로 보인다. 일을 해야 할 간부들이 실질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에서 왜 지금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국가정보원이 밝힌 현영철 숙청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다소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인민무력부장이라는 고위직에 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날아가는 상황이라면,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는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팽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납작 엎드려 지내는 것이다. 괜히 일을 벌였다가 잘 되면 본전이고 못 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뭐하러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겠는가? 남과 북 할 것 없이 분위기가 안 좋을 때는 ‘복지부동’하는 것이 보신주의의 상책이다.
특히 북한에서 대남사업은 더욱더 위험한 분야이다. 체제경쟁적 관계라고 생각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대남사업은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자칫 잘못했다 목숨 부지하기 힘들 수도 있는 분야다. 확실하게 남쪽으로부터 무엇을 얻어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면 모르되, 어설프게 발을 디디는 것은 신상에 이롭지 않다. 반기문 총장의 방북도, 반 총장이 공단 방문 전날 기자회견에서 했던 언급, 즉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개발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위반되는 사항”이라는 말을 북한 땅에 와서 했을 경우 생길 수 있는 북한내 후폭풍을 생각해보면, 북한 실무자들로서는 외교적 결례를 떠나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여유 없는 북한 간부들, 유화책보다는 강경책에 경도될 가능성
김정은 제1비서는 19일(보도일 기준) 대동강 자라공장을 방문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간부들을 심하게 질타했다. “전기 문제, 물 문제, 설비 문제가 걸려 생산을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넋두리”라며 북한의 물자 부족도 핑계로 규정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군소리 하지 말고 하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간부들에게는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어 보인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으니 일단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클 것이다. 이렇게 수세적이 되다 보면, 의견을 제시할 때에도 강경책이 힘을 얻게 된다. 강경책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유화책보다는 강경책을 주장하는 것이 내 신상을 보호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체제와 이데올로기는 달라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기본적으로는 똑같다. 공포가 심화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