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김정은 “실탄 소지 탈북 시도자 사살” 지시

▶전날 북한 주민들이 청취한 대북 라디오 방송 중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자유조선방송/1월 24일>

집중분석-탈북을 막기 위한 김정은의 공포정치

진행: 화제가 되는 뉴스를 살펴보는 ‘집중분석’ 시간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탈북자를 막기 위한 김정은 정권의 통제와 처벌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탈북자 가족들을 산골로 추방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 김민수 기자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진행: 탈북을 막기 위한 김정은의 조치가 심상치 않은데요, 최근에 탈북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담긴 문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죠?

김: 네. 평양소식통이 22일 자유북한방송에 보내온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된 문건이 최근 공개가 됐는데요. 국경경비대원들에게 ‘실탄을 가지고 탈북을 시도하는 자들을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문건은 올해 초 국가안전보위부나 국경경비대 고급군관(장교)들에게 배포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진행: 그럼 왜 탈북자를 사살까지 해야 한다는 겁니까?

김: 네. 한마디로 탈북이 조국 반역죄라는 겁니다. 문건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요. “사회주의 조국을 배반하는 반역은 천추만대를 두고도 씻지 못할 대역죄이다”, “하나의 민족으로 살기를 스스로 그만두기로 작정하고 동족의 가슴에 못을 박고 쓰린 상처에 칼질을 하는 남조선괴뢰들에게로 탈북을 감행한 인간들은 역적 중에 역적이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진행: 최근 탈북행위를 ‘김정은의 존엄을 훼손한 죄’로 다루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번 문건이 그걸 확인해 주고 있네요.

김: 그렇습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인민보안부가 주민 통제를 위한 4대 지침을 하달했다는 소식 전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김정은 명예훼손행위에 대해서는 ‘능지처참한다’는 위협을 했습니다. 이 명예훼손 행위 중 하나가 바로 탈북입니다. 그만큼 지금 김정은이 탈북을 막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진행: 탈북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탈북자 가족들까지 처벌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는데요,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김: 네. 지금 조·중 국경 지역에 인민보안부 산하 정치대학생들로 구성된 검열단이 파견되는 등 대대적인 검열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이들은 탈북자 가족을 색출하는데도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분주소(파출소)에 비치된 주민대장을 가지고 호구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행불된 세대원의 행적에 대해 엄격하게 조사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에 중국이나 한국에 간 것으로 추정되거나 확인된 주민뿐 아니라 가정에 행불자가 있으면 무조건 한국행으로 여기고 이들 가족을 닦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 탈북방조죄로 체포되는 일도 있는데요, 최근 양강도 혜산시 탑성동에서만 4세대가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진행: 탈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된다는 말인데, 이들을 산골로 추방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까?

김: 네. 최근 탈북한 사람들의 가족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함경남도에 설치한 집단 부락으로 강제 추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소식통이 어제 조선일보에 전한 것에 따르면, 북한 보위부가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전까지 탈북자 가족을 모두 추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함경남도 장진·부전·허천·금야 등지의 집단 부락에 강제 수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들 집단 부락 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지는 최악의 오지로 꼽힙니다. 북한은 지난해 1월 초부터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탈북자 조사를 벌이고 있고, 최근 평양에서만 탈북자 가족 수백 세대가 추방됐고, 함경북도와 양강도 등 북-중 국경 지역에서도 수백 세대 이상이 추방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신문은 전했습니다.

진행: 김정은의 이런 통제 때문일까요?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대폭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김: 일단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숫자가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탈북자 숫자가 2006년에 처음 2천 명을 넘은 이후 계속해서 2천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공식 등장한 2012년부터 탈북자 숫자가 500명가량이 줄었습니다. 지난해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는 1516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숫자가 줄어든 것은 김정은 정권의 탈북자 단속이 강화된 것도 원인이겠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먹는 문제가 나아지면서 탈북 숫자가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 북한 내부에 공포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데요,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가족 걱정이 많겠네요. 그런데 요즘 북한과 통화하기도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김: 네. 탈북 주민들은 중국 이동통신망을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를 파악하고, 돈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경통제와 함께 중국산 손전화기 사용을 막기 위한 단속도 대폭 강화됐습니다. 북한 당국이 방해전파기와 탐지기를 대폭 늘려서 통화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현재 보안원들은 중국 핸드폰 사용자를 적발하면 처벌하지 않는 조건으로 뇌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돈도 벌 수 있고, 또 승진기회를 잡을 수 있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추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매우 추운데도 새벽까지 마을을 돌면서 중국 손전화기 사용자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진행: 말 그대로 숨통을 조이고 있는데요, 민심 어떻습니까?

김: 요즘 조·중 국경지역에서는 인민반 회의 때마다 탈북을 방조했거나 탈북을 시도하면 엄중처벌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국경연선에서는 검열조에 의해 매일 체포되거나 단속을 당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는 살벌한데요, 그만큼 인민들의 불만도 치솟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살 길 찾아가겠다는 사람들을 잡겠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고 당국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진행: 네. 집권 3년째를 맞고 있는 김정은이 인민생활에 집중하기보다는 공포통치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불안한 만큼 북한 주민들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민심이 악화되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김정은 정권은 더욱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김민수 기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북한개혁방송/1월 24일>

파랑새 체신소(우체국)- 송정구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

안녕하세요. 북조선 청취자 여러분 저는 서울에 사는 대학생 송정구입니다. 벌써 15년 전에 떠난 북한이지만 고향이라서 그런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곳이 북한입니다.

더욱이 전 저보다 한 살 위인 형님이 저와 함께 남한으로 오지 못하고 북한에서 헤어지다 보니 늘 형님 생각만 하면 보고 싶고 그리워 막 미칠 것 같아요.

도대체 언제까지 한민족인 우리 겨레가 이렇게 갈라져 서로 찾고 부르며 안타깝게 살아야 합니까? 언제면 서로가 미워하지 않고 한민족으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게 될까요? 제가 우리 형과 헤어진 곳이 동해바닷가 청진 포구가 멀지 않은 애육원이었는데 오늘따라 너무나 보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밤, 저의 이 편지가 북한 어디엔가 살아계실 우리 형님에게 꼭 가닿기를 하나님께 빌고 또 빌며 이 글을 썼습니다.

-보고 싶은 형님에게-

형님, 그간 안녕하세요.

형님과 헤어진 지도 어언 15년이나 되었어요.

사탕 한 알이 생겨도 서로가 나누어 먹으며 다정하게 지내던 철부지 유치원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시절이 열다섯 번째 바뀌고 있어요.

형님, 북한의 하늘 아래 어느 곳에 혹시 살아나 계시는지, 세월이 갈수록 더욱더 그리워집니다.

형, 혹시 어디에서든 제 목소리를 듣고 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오늘 북한 개혁방송의 ‘파랑새 체신소’를 통해 남조선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 동생이 북한 어디엔가 살아계실 형님을 그리며 편지를 씁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형, 이 동생의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겠지요?

한 부모의 자식으로 1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난 우리 형제가 사방으로 헤어지고 갈라지던 고난의 시절을 저는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답니다.

형님, 생각나요? 형님이랑 제가 탄광 마을이 좁다하게 떠들며 뛰놀던 그때를요.

별로 좋은 옷은 아니어도 그땐 추운 줄도 몰랐고 좋은 음식을 못 먹었어도 밥투정도 몰랐어요. 왜냐면 그땐 아빠, 엄마가 다 계셨고 그 주변에 이모랑 삼촌이랑 옹기종기 모여 살았기에 늘 행복했고, 그 행복이 오래오래 계속될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요.

형, 나는 어려서 겪은 일이지만 지금도 생각이 나요.

우리 어머니가 중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 집이 그래도 다른 집보다 생활이 조금 좋았던 거랑 그리고 부엌에 들어서면 그릇이랑 정말 많았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가 보위부에 잡혀 들어가시면서 그때부터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했어요.

아빠가 술을 마시고 집을 나가면 들어도 오지 않고 어린 우리 두 형제는 갈 곳이 없어졌어요.

형, 그래서 이모가 얼마간은 불쌍하다고 거두어 주었는데 그때 이모네도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는지 모르죠?

이모네 다섯 식구에 우리까지 일곱 여덟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모 혼자 장사해서 먹여 살리기는 너무 힘드셨을 겁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우리 두 형제는 그때 학교에도 못 다녔지요.

형, 그러다 보니 이모가 너무도 보기가 딱해서 우리 두 형제를 청진에 있는 애육원(고아원)에 맡겼었지요.

그 시절, 부모가 있는 애들도 매일 굶어서 죽어 나가는 세월에 애육원이 잘 해주면 얼마나 잘 해주었겠어요.

그래도 우리 두 형제는 강냉이 한 알도 나누어 먹으면서 잘 지냈는데 어느 날, 형이 너무나 배가 고파 애육원에서 도망을 쳤어요.

형은 아마 제가 이렇게 말하면 기억이 날 겁니다. 그때 애육원이 너무 춥고 배가 고프니까 형뿐만 아니라 많은 애들이 매일같이 도망갔는데 애육원에선 그 애들을 매일같이 찾으러 다니 곤 했어요.

나는 그때 형보다 조금 작으니까 도망가면 죽는 줄 알고 배가 고파도 애육원 안에만 있었는데 형이 그렇게 애육원에서 나가면서 저와 형은 그때부터 영원히 헤어지게 된 거예요.

나는 애육원에 그냥 있었던 덕에 훗날 엄마가 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형은 끝내 찾을 수 없었어요. 애육원에서 3년째 되던 해에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먼저 나오신 어머니가 사람을 보내 우리 형제를 찾았는데 형이 없어 저만 한국에 온 겁니다.

형, 나는 지금 대학 졸업반에 다니고 있어요. 나는 초중부터 남한에서 다녔는데 지금도 대학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답니다.

형, 우리 어머니도 대학을 졸업하셨고 이제는 남한에서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남한에서 천사 같은 고운 마음을 가진 새 아빠도 만났어요.

형, 우리 가정은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요.

참, 작은이모네도 우리와 함께 남한에서 잘살고 있어요. 이모네 자식들도 다 대학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고요.

여기 남한에선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공부하고 자기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리고 누구나 노력하는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어요.

형, 내가 만약 북한에 그냥 있었다면 감히 오늘 제가 누리는 이 행복들을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요? 아마 저와 같은 또래 북한의 모든 청년들의 미래가 다 저처럼 바뀌었을 겁니다.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미래는 청년들에 의해 달라지거든요.

전 북한의 젊은 청년들이 하루빨리 북한이 처한 현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밝은 미래를 제 손으로 개척하길 바라요. 그래서 북한의 통일을 앞당기는 길에 선구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형님도 만일 저의 편지를 받게 된다면 남한으로 오시든가 아니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길에 살길 바랍니다.

형, 너무 보고 싶고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밤이 깊었어요. 다음 기회에 또 만나기로 해요.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우리 식구가 만날 그 날까지 잘 있어요.

2014년 정초. 서울에서 동생 정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