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D-30] `핫라인’ 재합의될까

지난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간 정상회담에서 필요성에 공감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남북 정상간 ‘핫라인’ 설치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 제2차 정상회담에서 재확인돼 실행될 수 있을까.

제1차 정상회담에서 이뤄진 합의 가운데 상호비방 중지, 개성공단과 경의선 연결 등 많은 것이 지난 7년간 즉각 또는 시차를 두고 실행됐으나, 합의와 공감에 그친 것도 상당수다.

이번 정상회담은 1차 회담 이후 진전을 토대로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 등을 더욱 진척시킬 새로운 합의를 목표로 하겠지만, 연속성 측면에서 6.15 공동선언을 포함한 1차 회담 때의 합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정상 차원에서 재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남북은 1차 정상회담 직후 적십자회담, 장관급회담, 국방장관회담을 잇달아 열어 상호비방 중지, 군사 핫라인 개설, 이산가족 상봉, 비전향장기수의 북송, 남북경협 활성화 등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로마 교황청 교황의 방북, 남북 당국과 민간간 통일방안 논의, 남한의 국가보안법과 북한의 노동당 규약의 적대조항 손질 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방북 후 귀환한 서울공항에서 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그외 여러가지 양해된 좋은 일이 있으나 (밝히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고 말해 미공개 합의도 있음을 시사했다.

다음은 이번 회담에서 재론되거나 재확인될지 주목되는 7년전 미이행 합의와 ‘양해’ 사항들.

◇남북정상간 ‘핫라인’ = 김대중 대통령(이하 당시 직책)은 2000년 6월 평양에 도착한 첫날 김정일 위원장과 가진 상견례 겸 첫 회담에서 남북 정상간 직통전화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김 위원장이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회담을 한다고 했을 때 (자료를) 많이 요구했는데 그 때 김영삼 대통령과 다정다심한 게 있었다면 직통전화 한 통화면 자료를 다 줬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김 대통령은 “앞으로는 직접 연락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2004년 두 차례 장성급회담 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우발적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한 군사 핫라인만 설치됐다.

◇통일안 논의 =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통일문제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끝에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6.15 공동선언)고 합의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앞으로 양측 대표,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토론해보자고 얘기했다”고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공항에서 밝힘으로써 통일안에 관해 남북당국.전문가간 구체적인 토론이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김 대통령은 “이는 통일운동사에서 구체적인 합의점을 발견하기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곧이은 남남간 통일안 논란 속에 남북간 논의는 발도 떼지 못했다.

◇남북연합제 제도화 =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안에 관해 김정일 위원장이 사실상 남측의 연합제안을 받아들였다며 연합제안은 “현재의 2체제 2정부를 그대로 두고 양쪽에서 수뇌회의, 각료회의, 국회 회의를 구성, 합의기관으로 만들어 차츰차츰 모든 문제를 풀자”는 것으로 설명했다.

정상회담 한달여 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각료회담을 정기적으로 하고, 양측 동수로 국회 회담을 여는 데도 합의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남북연합’ 수뇌회의의 전단계로 간주할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 불발로 이뤄지지 못했으나,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이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합의문에 명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남북간에 열리고 있는 장관급회담을 각료회의의 초보단계로 볼 수도 있으나, 이 역시 실질적인 장관회담이 되려면 이번 2차회담에서 분야별 세분화, 참석자의 격상 등 더욱 발전된 합의와 이행이 필요하다.

2차 정상회담에선 남북 국회회담 추진에 관한 합의 여부도 주목된다. 대북지원 사업 가운데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임을 감안하면, 남북대화에 국회의 참여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 남북은 1차 정상회담 뒤 이산가족의 서울과 평양 교환 방문, 금강산 상봉, 화상상봉을 거쳐 상봉의 상설화를 염두에 둔 금강산 면회소를 건설하고 있으며, 남한에 있던 비전향장기수 63명이 2000년 9월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북 이산가족들의 생사와 주소 확인, 고향방문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박재규 통일장관은 국회 보고에서 “남북이 이산가족들의 생사와 주소를 확인하고 면회소에서 상봉할 수 있도록 협의하고 협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그해 8월 방북한 남측 언론사 사장단과 오찬 자리에서 “내년(2001년)에는 이산가족들이 집에까지 갈 수 있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다만 “이산가족 문제는 준비없이 갑자기 하면…비극적 역사로 끝나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버릴 수 있다. 우리는 50년간 서로가 지워버릴 일이 있는 처지다…너무 인간적인 것과 동포애만 강조하면 안된다”고 전제를 달았었다.

◇서울 답방 = 6.15 공동선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했고, 김 위원장 본인도 남측 언론사 사장단에 “적절한 시기에 답방하겠다”고 거듭 확인했지만, 불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공항 방북 설명에서 이 문제는 “합의를 보는 데 좀 힘들었다”고 난제 중 하나였음을 시사했으나 “(김 위원장이) 우리와 ‘합의된 시일안’에 서울을 방문키로 결심했다”고 밝혔었다.

그 한달여 뒤 정형근 의원은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6개월에 한번씩 만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안다”며 “서울 답방이 늦어도 내년초에는 이뤄질 것이라는 게 책임있는 당국자의 전망”이라고 주장했다.

답방이 결국 무산된 배경과 관련, 주목되는 것은 김 위원장이 2001년 5월 방북한 요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와 회담에서 밝힌 입장.

그는 서울 답방의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하면서도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나서 결정하겠다. 미국이 한국에 갖고 있는 영향력 때문에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가 새로 들어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던 것을 가리킨 말이다.

대미관계가 개선되는 상황일 때는 ‘개방’형 행보를 보이고, 대립적인 상황에선 ‘은둔’형으로 돌아가는 김정일 위원장 대외행보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임기말인 2000년 12월 북한과 미사일 협상 체결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 막바지 단계이던 중동평화 협상 때문에 방북을 포기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4년 6월 발간한 자서전에서 “내 임기가 10주 남았었는데, 방북하려면 한국과 일본, 중국도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1주일 이상 소요될 터였다”며 “아라파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생산 중단 협정을 맺기 위해선 북한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아라파트는 ‘이번에 중동평화협정을 맺지 못하면 또 5년이 걸릴 것’이라며 가지 말 것을 호소했다”고 회고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직접 방북을 추진했던 것은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미관계 개선을 적극 권하고 이를 수용한 김 위원장의 뜻이 미국에 전달된 데 따른 것이었다.

클린턴의 방북이 이뤄졌더라면 그 방북의 후광을 업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정형근 의원의 주장처럼 늦어도 2001년 초까지는 이뤄졌었을 수 있고, 그랬다면 갓 출범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재검토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역사의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클린턴은 임기 10주를 남기고 방북을 검토했었지만, 현재 부시 대통령의 임기는 1년 넘게 남았다.

9월 열리는 북핵 6자회담과 10월2-4일 예정된 남북정상회담, 이어 10월 중순 6자 장관회담 등의 결과가 김정일 위원장의 대외 행보와 부시 대통령의 대북 행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역사의 예상’은 `가정’만큼 쉽지 않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