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지도자, 지형파악·공작원 육성 위해 해상납치 직접지시”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군관으로 있으면서 북한 당국에 의한 납치 활동을 160여 차례 수행했던 김훈씨의 증언을 들어봅니다. 김훈씨,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 북한 어느 지역에서 사셨나요?


저는 북한에서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했고, 군 복무는 동해안 원산과 남포 양쪽을 왔다 갔다하면서 했습니다. 탈북은 2012년 6월에 해서 한 달 후인 7월 16일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직행한 것이죠.


– 군관으로 일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맡으신 건가요?


북한 정찰총국에는 해상 납치나 다른 나라로의 공작원 파견, 정찰조 파견을 통한 테러 등을 수행하는 부대가 있습니다. 해상국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복무했던 데는 이른바 북한에서 말하는 중앙당 연락소라는 곳으로, 작전부 산하 기관입니다. 예전에는 7부라고 불렀지만, 요즘은 부서가 바뀌어 6부라고 부릅니다. 당시 당 작전부 부장은 오극렬이었습니다. 오극렬은 지금도 작전부 부장으로 있습니다. 나이가 80살이 넘었지만, 북한에서 정찰 사업은 일관되게 진행해야 하는 비밀스런 일인 만큼 오극렬이 오랫동안 부장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에 대한 북한 당국의 납치가 시작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1960년대 초반부터였습니다. 정찰총국은 1962년 해상침투부대를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만들었습니다. 또 당 연락소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정찰총국의 것을 모방해 적극적으로 해상 납치 임무를 수행했죠. 오히려 정찰총국보다 더 강한 기지들이 생겼습니다. 주로 청진과 김책, 함흥, 원산, 남포, 해주 등 바다를 끼고 있는 데는 다 있었습니다.


– 납치가 가장 많이 이뤄졌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북한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85년까지 거의 20년 간 집중적으로 납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사실 납치라는 말을 안 씁니다. ‘어민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 납치조에 납치 지령이 내려오기까지 어떤 단계를 거치게 되나요?


사실 국제사회는 북한인권 문제를 크게 논하면서 납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던데, 제가 북한에서 복무할 때만 하더라도 다른 나라들에 침투해 그 나라 사람을 납치해오는 일은 가장 낮은 단계의 작전이었습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과 필리핀, 동남아시아 등에 침투하는 작전이었죠. 그래서 일단 침투 작전은 우선시했지만, 어민 작전과 밀로, 즉 정찰 지역을 탐색하는 작전은 낮은 단계로 취급했습니다. 밀로는 자신의 이력에도 기록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 주로 어떤 사람이 북한의 납치 대상이 되나요?


어민만 납치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 나라 땅에 발붙이고 산다고 해도 북한의 표적이 되면 속수무책입니다. 북한이 필요한 시기에 ‘저 사람’이 필요하다고 인정만 하면 가리지 않고 납치합니다. 일본에서도 납치 피해자 메구미 씨가 있죠. 그 사람도 해상에 나왔다가 납치된 게 아니라, 해안가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납치된 겁니다.


어민들에 대한 납치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건, 이들에 북한의 시야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민들은 각 나라에서 배를 타고 멀리 나가 고기잡이를 하기 때문에 자국민의 주의 속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게 되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북한이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을 예로 들면, 강릉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거주하던 어민이라 해도 부산이나 제주까지 나가 고기잡이를 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즉 어민들이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니 이들이 지형도 잘 알고, 군사기지나 미사일 기지 위치도 알 수 있다고 북한이 판단하는 것이죠.


특히 북한은 바다의 저질(底質) 상태를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데요. 저질이 자갈인지 감탕인지, 또는 모래인지 확인해야 하는 겁니다. 또 한국이 부두나 항만을 자주 건설하는데, 북한에선 이 항만이 어떻게 생겼는지, 방파제 길이가 총 얼마나 되는지, 그 앞에 장애물은 무엇이 있는지 등을 다 살피려 합니다. 왜냐면 북한에선 조국통일 대사변을 맞이한다면서 상륙함을 남쪽 해안가에 침투시키려 하는데, 그러려면 바다 밑 지형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암초가 많은 지역에 잘못 들어갔다가 배가 파손되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으니, 미리 지형을 잘 알아 두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잘 알고 있는 어민들을 납치 목표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납치한 어민들을 재무장시켜서, 즉 북한에서 말하는 식으로는 완전히 ‘주체사상화’ 시켜서 공작원으로 남한에 다시 침투시키는 일도 했었습니다.


한편 납치라고 할 때, 그 사람을 그냥 데려와 정보를 수집하고 그 다음엔 알아서 살라고 놔두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북한의 납치 행위는 인권 유린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에서 생활할 때는 어민 작전에 동원된다는 게 매우 성스러운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조국 통일을 위한 일이자, 온 지구상을 김일성주의화, 공산화하기 위한 혁명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세계 혁명을 위해 다른 나라 어민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 죄책감은커녕 성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어민 작전에서의 주요 납치 대상은 어민들 중에서도 가장 또릿또릿하고 나이도 적은,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써먹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로 배에 침투하면 작은 배는 2명이, 그 이상 규모의 배에는 네 명이나 다섯 명, 많으면 일곱이나 여덟 명 정도의 어민이 있었는데 그 중 오로지 한 명만 선택해 납치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죽입니다. 단 북한 소행이라는 흔적을 없애야 하니까 어민들을 배의 어창, 즉 고기를 보관하는 장소에 넣고 와이어로프로 문을 봉인해버립니다. 그럼 배가 순식간에 물 밑으로 가라앉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죠.


제가 있을 때만 해도 한국과 일본 어민을 대상으로 약 80여 차례 납치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한국에선 어느 정도 북한이 납치해 흔적을 없앴다는 걸 알고 있던데, 일본에서는 도무지 알아채지를 못하더군요. 모두 수장해버리고 어민 중 단 한 사람만 데려가는 것이니까요. 그런 일을 한 게 저는 20년, 북한 차원에서 실시한 건 40년이 다 되네요. 그래도 여전히 이 납치 작전은 안개 속에 있죠.


– 2002년 9월 평양에서 북일 정상회담을 할 때, 김정일이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가 북한 당국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게 아니라, 특수 기관 내 영웅주의자들에 의한, 즉 일부 개인들에 의한 활동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이러한 납치 활동은 당과 최고지도자 승인 하에 이뤄지는 건가요, 아니면 각 기관 일부 담당자들에 의해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건가요?


북한에는 즉흥적이라는 게 없습니다. 김정일이 1970년대 후반에 최고지도자의 후계자로 등극하면서 말한 게, 열 가지를 하고 싶어도 당에서 한 가지를 하라고 하면 무조건 이 한 가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업은 위에서부터 방침을 받고, 최고지도자의 친필 서명에 의한 지시에 따라 행하게 돼 있습니다. 특정 섬에 포격을 하는 일들도 최종적으로 최고사령관의 지시에 따르는 겁니다.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지금은 김정은의 지시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북한 체제는 결국 하나의 지휘봉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돼 있습니다. 납치 작전 역시 김정일이 모두 주도해놓고선 발뺌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가 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어도 결국 개죽음에 지나지 않겠다는 걸 비로소 느끼게 되더군요. 무주고혼(無主孤魂)이라는 말이 있죠, 그 누구도 찾아가지 않는 죽음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이 작전을 수행하는 사람들도 참 불쌍한 인간들이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 북한에 의해 납치됐떤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납치된 사람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나가지도 못한 채 그저 통제 속에서 숨죽이고 있죠.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자칫 행동을 잘못하면 간첩이나 도주자로 여겨져 즉시 처형되기 때문에 꼼짝 못한 채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함경남도 홍원군에 가면 월북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군인 생활을 하다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월북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촌이 있는 건데요. 그들도 좁은 울타리 안에서 나가지도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 그 곳에 가서 교육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적구에 침투시킬 부대인 만큼 남한 군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남한의 훈련 방식이나 구령, 일과 등에 대해 이론적으로 배우고, 실제 동작과 같은 것들은 그들로부터 한 달간 집중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국말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 앞에서 시험을 친 후 합격 여부를 평가 받는 식이었죠.


– 지금도 북한 당국에 의한 납치가 계속되고 있을까요?


북한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납치 작전을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원래 1985년까지는 서로 경쟁적으로 납치 작전을 수행해왔는데, 어느 순간 줄어들기는 했어요. 다만 이게 인간적으로 납치는 옳지 않다는 감정에 의한 게 아니라, 납치해온 어민들을 남한에 공작원으로 파견시켰더니 이들이 이중간첩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양다리를 걸쳤다고나 해야 할까요. 북한의 임무를 수행하는 척 하면서 남한에 와서 자수를 했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납치한 사람을 공작원으로 만들어 침투시키는 게 성공률이 낮다고 판단한 것이죠.


다만 그들을 공작원으로만 쓰지 않는 것뿐이지, 그들로부터 항만이나 항구, 바다 저질, 지역 내 군사기지들, 해안가 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를 알아내려면 어민 납치가 반드시 필요하고요. 물론 이미 북한 공작원들이 세계 각지에 파견돼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제 사람도 잘 믿지 않고,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재확인하려 합니다. 즉 공작원이 파견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면, 관련 지역을 잘 아는 어민을 납치해 이 정보가 사실인지 재확인합니다. 이 정보를 다시 정찰조에 보내 추가로 두세 명을 해당 지역에 파견시키고,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을 촬영해오도록 해 최종적으로 정보가 맞는다고 판단되면 그제야 최고사령관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면 최고사령관이 아주 잘했다고 치하를 해든가, 영웅 칭호를 수여하든가, 또는 높은 급수의 훈장을 내리고는 하죠.


– 김 선생님도 북한 당국에 의한 납치 활동에 실제 참여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돌이켜보면,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곳에 와서야 북한이라는 곳이 가장 비인간적인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북한은 항상 주민들에게 자기네야 말로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존중한다며 주체철학과 같은 것들을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들을 참혹하게 수장시키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몇 십 명이든 아니 몇 백만 명이든 죽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한이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인간 생지옥이자 최악의 야만 국가인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야 저도 통절하게 느끼면서 제 작전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늘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국에 세뇌됐던 나머지, 북한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요즘도 자기 비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북한에 의한 강제 납치와 실종 피해자가 20만 명을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강제 납치와 실종은 그 자체로 중대한 인권 유린입니다. 또한 피해자들은 북한 당국을 위한 노동력 및 기술 제공, 간첩 및 테러 활동에 투입됨으로써 2차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여전히 자행하고 있는 강제 납치를 즉각 중단하고, 납치 피해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