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 묶는 국정원 개혁안 동의할 수 없다

지난해 국정원 선거 개입과 관련 여야 정쟁을 보면 우리 정치 현실을 실감케 해준다. 민주당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임에도 이 사건을 여당과 정부를 비판하려는 주요 소재로 삼았다. 새누리당도 여당으로서의 합의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쟁에 매몰돼 1년여 시간을 허송세월을 보냈다. 정쟁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고조되자 여야는 지난해 말 국정원 개혁특위를 만들고 국정원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국정원 개혁특위가 최근 합의한 내용을 보면 국정원을 ‘개혁’하려는 것인지 ‘개악’하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민주당은 댓글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선거개입의 정확한 실체가 규명되기도 전에 개혁특위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새누리당은 이를 받아 드렸다. 새누리당이 백기를 들은 모양새였다. 이번 특위에서 민주당이 주장하는 안(案) 대부분이 관철됐다. 개혁방안의 골자를 살펴보면 국회 정보위의 상설화, 국정원 예산통제권 강화(세부 항목까지 국회보고), 정치관여 행위 처벌강화, 국회 정보위원의 비밀열람권 보장, 내부고발자 신분 보장, 사이버 심리전 활동 규제 등이다.


한마디로 국회가 정보기관을 제멋대로 통제하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우려스럽다. 만약 여야가 합의한 대로 국정원 개혁이 이뤄진다면, 국정원은 기독교 구약 성서에서 나오는 삼손이 델릴라의 꼬임에 머리카락을 잘려 힘을 상실 것처럼, 머리카락 잘린 삼손이 되어 버릴 공산이 크다.


첫째, ‘국회 정보위의 상설화’와 ‘비밀열람권 보장’ 관련이다. 국회가 시도 때도 없이 비밀정보 열람을 청구하겠다는 뜻으로 대통령 직속기관인 정보기관을 마치 국회 시녀로 만들겠다는 의도다. 지금까지 정보위만 개최되면 정보위원들에 의해 기밀사항들이 일일이 언론에 공개되어 온 것을 감안할 때, 앞으로 정보기관의 기밀사항들이 보안의식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제멋대로 비밀사항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그런데도 의원들은 자신들의 성과처럼 자랑할 것이다.


둘째, 국정원에 대한 예산통제권 강화도 마찬가지다. 예산을 통제한다고 하지만 정보기관의 예산은 단순한 행정부처의 예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부 예산내역이 공개되면 조직과 인력 규모는 물론 정보기관의 활동 내역과 역량이 적(敵)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꼴이 된다. 오죽하면 미국 연방법원에서도 과학자협회가 요청한 CIA의 예산정보 공개에 대해 “조각정보로 전체 실체를 규명할 수 있다는 ‘모자이크 이론’을 들어 정보기관의 예산 공개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겠는가? 미영 등 대다수 선진국은 정보예산 비공개, 총액 배정, 의회 내 별도 위원회의 총액 심사 등 정보예산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 국회가 정보기관 예산을 일일이 통제하겠다는 것은 국정원 업무 전체를 통제·장악하겠다는 뜻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며, 국회가 정보기관의 모든 정보활동을 통제하고 감독하겠다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셋째, ‘내부 고발자 신분보장’도 그렇다. 지나치게 ‘내부 고발자’를 보호할 경우 ‘비밀엄수의 원칙’이 무너져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정보기관 조직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국정원은 앞으로 기밀유지가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조금만 불평불만이 생기면 “정치활동이라며 상급자의 직무명령을 거부하면서 동료직원을 내부고발”한다면, 급기야 정치권과 연계된 간첩 검거나 종북세력 척결 업무에는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일부 몰지각한 직원들의 불순한 내부고발’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어 앞으로 정치권 줄대기가 기승을 부릴 것이 뻔하다. 소위 ‘댓글사건’에서 보듯이 정치권에서도 국정원 직원 매수행위 또한 비일비재하게 발생할 것 같다.


넷째, ‘사이버 심리전 활동의 규제’ 부분 또한, 조항 신설을 통해 “국민을 상대로 한 정부정책 홍보를 금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북한은 정부정책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선전선동에 혈안인 점을 감안해 볼 때, 이 같은 규제는 우리 정보기관의 손발만 묶는 것이 아닌지 안타깝다. 전 세계는 사이버 정보전이 한창이고 북한 또한 인터넷을 국가보안법의 해방구로 인식하면서 사이버 심리전 부대를 확대해 사이버 해킹·대남 선전 선동을 전개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특히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감안할 때 국정원의 대북 역량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돼야 할 상황이다.


이런데도 국정원의 역량강화 보다는 정치적 명분에 눈이 어두워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국정원의 손발을 묶고 식물기관으로 전락시켜 ‘적전 앞에 항복하는 항장의 모습’으로 만들어 결국 퇴출시키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특히 여당은 다수의석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자신들이 ‘선진화법’을 만들어 족쇄를 차고 민주주의 근간인 다수결의 원칙을 포기, 야당에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을 지금까지 보여와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볼 수 없는 상식이하의 대의 기관 정치행태를 탄생시켰다.


정보기관의 업무가 일일이 까발려지고, 더 이상 비밀이 없게 된 ‘공개 정보기관’이 과연 앞으로 간첩을 어떻게 잡을 것이며, ‘고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제2의, 제3의 정치권 RO사건 발생’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속수무책 무능기관이 될 것이 뻔하다. 여기에 민주당은 새누리당에는 밀어붙이면 된다는 약점을 알고 대공수사권을 검경에 이관시키겠다고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개혁대상은 국정원이 아니라 당리당략으로 민생법안과 안보 관련 입법은 외면한 채 각종 수당이나 지역구 이권이나 챙기는 국회의원 그들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