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6군단 쿠데타모의사건’ 아시나요?

최근 <자유청년동지회> 활동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북한 내 반체제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북한 반체제 활동은 남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꾸준히 발생해왔고 최근 들어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난으로 체제 이완이 심화되고 탈북자를 통한 외부정보 유입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북한 군부내 반체제 사건으로는 92-93년도에 발생한 ‘푸룬제 군사대학 출신 반역모의 사건’과 95년도에 발생한 ‘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이 있다. 민간차원에서는 대규모 반체제 조직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지만 황장엽 전 비서가 김일성대학 학생들이 반체제 활동을 벌이다 처형당한 사실을 전해 들은 바 있고, 북한에 유학했던 이영화 일본 간사이대학 교수가 북한 반체제 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한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삐라나 전단이 자주 목격된다고 전해진다.

1999년 미 행정부 극비문서에 기록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김정일 정권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협을 가했던 사건은 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이다. 함경북도 청진 인민군 무력부 6군단에서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 장성급을 포함 군 간부 40여 명이 처형당한 대형사건이다.

인민군 6군단 사건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진위 여부에도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사건 파장이 함경북도와 군단 전체로 미쳤기 때문에 북한 내 군대 및 정보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99년도에 워싱턴 타임즈 빌 거츠 기자가 공개한 미 행정부 극비문서에도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다양한 증거가 명시되어 있다.

당시 6군단은 청진에 사령부를 두고 함경북도 전체를 관할하고 있었다. 6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4개 방사포 여단, 1개 포병사단을 전투부대로 구성하고 있었다. 병력의 절반은 군단 직할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지방군으로 충원하게 되어 있었다.

쿠데타 모의는 6군단 정치위원(소장에서 중장 계급)을 중심으로 예하 부대 대대급 지휘관까지 확산되었다. 여기에 함경북도 도당 책임비서, 행정일꾼, 국가안전보위부, 사회안전부(인민보안성) 부부장 이상 간부급이 대거 가담했다. 당시 함경북도 군, 당, 행정 책임자 대부분이 이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 3백-4백 명이나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6군단 쿠데타 모의가 이처럼 도(道) 전체로 확대되고 있었음에도 당시 6군단장이었던 김영춘(94년 3월 6군단장 부임)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정치위원들은 만경대 혁명학원 출신으로 김일성과 친인척 관계에 있었던 김영춘을 제외시켰다.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김영춘은 쿠데타 진압을 도와 95년 10월 인민군 총참모장에 올랐다.

쿠데타 모의에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모은 달러를 사용했다. 국경지역 군부대는 중국과 무역이나 밀수를 통해 손쉽게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직 확대를 위한 과도한 달러 유통이 단서가 되어 쿠데타 모의는 군 보위국의 수사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당시 쿠데타를 모의했던 6군단 장교들이 모두 처형당해 구체적인 쿠데타 계획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부 핵심기관에 근무했거나 쿠데타 진압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탈북자로부터 두 가지 작전 계획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6군단이 직접 평양에 잠입하는 것이다. 6군단 산하 한 특공대가 중앙당 청사에 있는 김정일 집무실을 점령하는 동시에 조선중앙방송국을 접수한다. 이어서 6군단의 주력은 이 쿠데타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일제히 군사작전에 돌입, 평양호위총국, 방어사령부, 평양고사포사령부의 각 사단, 여단 지휘부를 점령해서 지휘체계를 완전히 마비시키도록 계획돼 있었다. 그러나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이러한 작전계획은 함경북도와 평양이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접근이 용이치 않고 6군단의 무장력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는 6군단 단독으로 평양을 장악하기는 힘들다는 판단 하에, 한국군 및 미군을 나진항으로 끌어들여 후방 전 지역을 확보하고 6군단이 특공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들어가 지휘계통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사돈의 6촌까지 처벌

6군단 사건 발생 직후 북한 군 당국은 6군단 내 24사단과 5군단 소속 34사단을 교체하고 나머지 군단을 함경남도 7군단과 교체한 후 24사단 병력 전원을 몇 년에 걸쳐 전역시켰다. 쿠데타 모의에 관련된 핵심 관계자는 전원 처형당하고 가족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핵심 관련자는 친족뿐 아니라 사돈의 6촌까지 처벌당했다고 한다.

당시 6군단에서 근무했던 한 탈북자는 “어느날 갑자기 부대를 소집하더니 그날 당일 전체 부대원을 대열차(군대 수송차량)에 태워 함경남도로 보내버렸다”며 “당시 소대장은 6군단 지역 전체 정보가 남조선에 입수됐기 때문에 취한 조치라는 말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95년 북한 인민군 6군단 쿠데타 기도 사건은 결국 실패했지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북한 군부가 무조건 김정일 충성 일변도가 아니라는 점과 북한 내에서도 조건이 성숙되면 반체제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