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의 벽보, 서울의 連帶

한반도 전체가 수렁에 빠져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역사상 가장 수구반동적인 수령독재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올드 레프트(구식 좌파)적인 물결과, 그것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는 야당의 역부족으로 인해 정체와 혼미에 빠져 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이 다 같이 이런 ‘기능불능’에 묶여 있는 한, 남북 한반도인들은 ‘자치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경멸을 받으며 또다시 열강들의 ‘관리대상’으로 전락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꼴을 당하지 않고 우리의 2세, 3세들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적(知的) 통찰과 상상력을 동원해 이 정체된 한반도 현실을 뛰어넘기 위한 획기적인 비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그 비전을 ‘북한 상황변환’과 ‘대한민국 업그레이드’라고 설정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향한 북한 주민들의 변화의 열망을 지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호(號)의 경영철학과 리더십을 격상시키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한쪽의 막힌 것을 뚫는 것만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무슨 수로 양쪽의 막힌 것을 동시에…?”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의 정치는 이미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돼버렸고, 그래서 예컨대 북쪽 수령독재에 변화가 일어나면 남쪽 수구좌파도 덩달아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반도 대변환의 ‘로드 맵’은 의외로 간단명료할 수도 있다, 만약 북쪽에서 “수령독재 물러가라!”는 목소리가 지각을 뚫고 터져 나오고, 그 여파로 남쪽에서도 “수령독재 감싸주던 수구좌파 물러가라!”가 봇물을 이룬다면, 그리하여 그 양쪽의 함성이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린다면, 한반도 전체의 민주화, 선진화 변환은 순식간에 이 시대의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환상만은 아니다. 한반도 최후의 결전, 분단시대 최후의 결전은 이미 이 시각 남북한에서 각각 초읽기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울려 퍼진 “김정일은 개혁개방을 하든가, 아니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외침과 벽보, 그리고 지난 21일 서울 삼성동에서 있었던 ‘자유주의 그룹’들의 첫 연대모임-이 두 사건은 비록 작은 불씨였지만 ‘한반도 전체의 민주화, 선진화’ 지향을 집약적으로 상징한 것으로 믿는다.

모든 것이 뜨거운 염력(念力)의 산물이라고 할 때, 이 작은 불씨는 머지않아 큰 폭풍을 만들어내는 한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회령 사건은 그 사실과 과감성에 대해 더 확인해 볼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그것이 갖는 긍정적 파괴력-특히 남한 수구좌파의 지금까지의 이론적 대전제에 대한 파괴력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네들은 지금까지 예(例)의 ‘내재적 접근법’에 따라 ‘수령과 인민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라고 하는 북쪽의 수령독재론을 한번도 비판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은 “효심이 대단하고, 식견 있으며, 말이 되는 사람…” 운운하며 회령의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북한주민의 장렬한 절규인 것으로 드러날 경우 그들의 입지와 체면은 그야말로 총체적 붕괴 그것일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점 때문에 일부에서 회령 관련 동영상의 진정성을 그토록 깎아 내리고 물타기 하는 것 아닐까?

남쪽의 자유주의적 선진화 운동과 북쪽의 주민 생존권 투쟁, 개혁개방 투쟁은 서로 맞물리면서 한반도 수구좌파 연합에 대한 대안(代案)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만은 충분히 던져 주었다. 문제는 그것이 2005년 한반도 국제정치와 또 어떻게 맞물려서 구체적 작품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다.

한반도 전체의 ‘막힌 것 뚫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거기에 우리 자손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면, 우리의 선택은 자명한 것 아니겠는가?

류근일 / 본지 고문(前조선일보 주필)
(조선일보 1월 25일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