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조총련 간부로 北 충성한 아버지 ‘Dear 평양’

재일조선인출신 양영희 감독은 1995년부터 10년 동안, 일본과 평양에서 아버지와 가족들을 직접 찍은 필름을 편집해 ‘디어 평양’을 내놓았다. 최근 이 영화가 서울 명동의 한 극장에서 개봉했다.

일본인들은 ‘발칙한’ 영화제목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구상 최악의 나라’ ‘배추머리의 독재자가 있는 나라’ ‘민주주의와 자유 수준 꼴찌’ 같은 수식어가 붙어있는 나라, 북한의 수도에 ‘Dear’를 붙이다니!

세계인들에게 북한은 인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는데 지도자는 핵과 미사일로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이상한 나라일 뿐이다. 그런 곳에 친근감의 표시인 ‘dear’라는 수식어는 어쩐지 생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양영희 감독의 ‘Dear’는 ‘혁명의 수도’ 평양에 붙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평양은 조총련 간부로 평생을 북조선을 위해 일한 감독의 아버지를 지칭한다.

영화는 ‘문제아’ 막내딸과 아버지의 화해를 담고 있다. 감독은 조총련학교를 나와 조총련계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아 아버지에게만큼은 문제아였다.

감독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속 아버지는 우리시대의 ‘아버지’와 별다를 것이 없다. 자식이 기대에 부응하길 바라고 빨리 결혼해 안정을 찾기 바란다. 영화는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조총련간부로서가 아닌, 아내와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감독의 아버지 양공선씨는 15살 때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해 조총련에 가입했다. 조총련의 창립부터 최근까지도 열성적인 간부였으니 직접 만들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는 1971년 세 명의 아들을 북송선에 태워 평양으로 보낼 정도로 북한에 충실했다.

세 아들을 보낸 뒤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열성적으로 조총련 활동을 했다. 평양의 아들들이 장성해 결혼하고 손주들까지 생겼다. 그들이 일본에 올 수 없었기 때문에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직접 방문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정기적으로 학용품이며 약, 옷가지들을 7~8개의 큰 상자에 가득 포장해 평양에 보내곤 했다. 평양의 손자가 난방이 되지 않는 교실에서 공부하다 동상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커다란 상자에 손난로를 가득 담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는 아들들이 장군님의 품안에서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2001년 양감독은 아버지의 칠순잔치를 위해 다시 평양을 찾는다. 평양 옥류관에서 화려하게 벌인 칠순잔치는 물론 아버지가 직접보내준 돈으로 연 것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하객들에게 조국에 충성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때까지도 양감독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조국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오빠들과도 떨어져 있어야하고, 넉넉지 않은 형편에 돈까지 보내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국적변경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아버지의 사상에 동의하지 못해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간다.

그러던 양감독은 미국에 유학해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면서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최근 만난 아버지는 양감독에게 국적을 한국으로 바꿔도 좋다고 허락한다. 또 아들들을 북에 보낸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평생을 조총련간부로 북조선을 위해 충성을 다했지만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영화 속에 비춰진 평양의 모습은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보여주는 모습과 큰 차이는 없다. 조카들은 밝고 명랑하며 피아노 연주도 잘한다. 오빠네 가족들은 특별히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조국을 위해 기꺼이 돌아온 귀국영웅들이기 때문이거니와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부모님 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감독은 아들을 북송하고 더 열성적으로 활동했다는 어머니를 회상한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북한에 있는 자식들이 좀 더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감독은 한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해 할 말은 많았지만 절제하며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북한에 해가 될 만한 것을 찍으면 다른 테이프마저 압수당할 수 있어서 아예 찍지 말라는 것은 찍지 않았다고 한다. ‘디어 평양’은 가족애와 세대간의 차이에 대한 영화지, 운동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사는 것은 재일한국인으로서 사는 것과 또 다른 갈등과 차별이 존재한다고 한다. 재일조선인은 ‘조총련’에 소속되고 재일한국인은 ‘민단’에 소속된다. 조총련과 민단 사이의 갈등이 남과 북의 갈등만큼이나 컸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그 둘 사이의 갈등보다 조총련사회의 침체가 더 심각한 상황이다. 북한사회의 위기와 함께 조총련의 위기도 온 것이다.

북핵사태 이후 달러 송금도 어렵고 물품도 보내기 어려워졌다. 북한에 친척이나 가족이 있는 조총련에게 ‘조국’의 요구를 듣지 않는 것은 가족을 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북송선을 태워 보낸 부모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기에 이미 늦어버렸다.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조국’에 충성하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들에게 ‘평양’은 ‘혁명의 수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곳이다.

평양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도 아버지임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감독이 아버지를 향해 ‘Dear’라고 붙이는 마음이 너무 아름답게 전해진다.

최옥화 / 대학생 웹진 바이트(www.i-bait.com)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