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주체사상 붕괴와 北주민 정신적 충격 대비해야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새로운 체제를 수용하면서 나타났던 공통적인 현상은 새로운 민족주의의 부활이었다. 체제 전환기의 동구권에는 민족주의의 망령이라고 불릴 정도의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불거졌다. 냉전이 끝난 후 국민들에게는 붕괴한 사회주의 사상을 대체해 줄 새로운 사상이 부재했고, 그 자리에 민족주의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구 소비에트 연방 체제와 유고연방이 해체 후 여러 독립국가로 다시 탄생한 것도 정신적 공허함으로부터 발호한 민족주의의 망령 때문이었다.

동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와 시장경제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아온 동독인들은 통일된 사회의 상황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정신적 공허함과 공황 상태를 다음 두 가지로 채웠다. 하나는 서독의 풍요로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치즘이라는 국수적 민족주의였다.

초기 동독인들은 서독의 자동차와 가전제품, 의류 등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손에 쥔 돈으로 과거 동독 시절에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로움을 사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서독의 중고 자동차는 동독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었다. 분단 시절 서독과 서베를린 통과 구간에서 느꼈던 열등의식을 보상이라도 하듯, 어떻게 해서든지 서독 자동차를 손에 넣고자 했다.

물질적 풍요로움 못지않게 동독인의 정신적 공허함을 채워준 것이 민족주의였다. 무엇보다도 사춘기 청소년들은 나치즘을 동경했고, 동독 지역 곳곳에 히틀러를 추종하는 청소년들의 그룹, 이른바 네오나치들이 탄생하게 됐다. 네오나치들은 산 속에서 집단 훈련을 실시했고, 외국인 테러를 위한 모의 훈련을 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동독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 근로자들은 네오나치들의 주 표적이 됐고, 통일 직후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네오나치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작센 주(州)의 호이어스베르더(Hoyerswerder)는 통일 직후 네오나치들의 민족주의 망령이 부활하는 데 시동을 건 도시였다. 동독 청소년들이 외국인 거주 지역을 방화하고 외국인을 추방하라고 요구하는 집단 시위를 벌였다. TV 화면에는 불길 뒤쪽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흑인과 베트남인들의 모습이 연일 방영되기도 했다.

통일 후 민간에 이양된 동독 기업이 구조조정을 통해 많은 실업을 초래했던 것도 당시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에 불을 지폈다. 호이어스베르더 외국인 숙소 방화사건에 이어 네오나치들의 테러가 계속됐고, 1993년까지 무려 21명의 외국인들이 이들의 손에 희생됐다. 1992년 3월 15일 구 동독 북부 메클렌부르그에서는 청소년들이 루마니아 청년을 집단 구타해 살해했고, 3일 후인 18일과 19일에는 히틀러와 스킨헤즈(네오나치)를 욕했다는 이유로 시민 2명을 공격해 살해했다. 이후에도 베트남 청년,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온 폴란드인, 유고인들이 살해됐고 이미 독일에 이주해 정착해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공격의 대상이었다.

네오나치들의 테러는 동독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독에서도 이들의 테러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져 히틀러 시절 지하운동이었던 ‘흰 장미(Weisse Rose)’ 운동에 뿌리를 둔 횃불시위가 뮌헨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서독의 졸링겐 방화사건으로 터키 여성과 아이 등 6명이 사망한 사건은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통일 후 주체사상의 붕괴로 심한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릴 북한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준비와 대책이 필요하다고 교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