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 탈북자 생존지침 ‘태극기를 향해 뛰어라’

중국 투먼 구류장의 전경. 왼편 정문 옆으로 감시탑이 있고 파란 지붕의 건물이 탈북자들이 수용되는 곳이다. 오른편 신축 건물은 구류장 본관 ⓒ데일리NK

“두만강을 넘어 싼허(三合)에 있는 한 농가(農家)에 들어갔더니 집 주인이 저를 인신매매꾼들에게 팔아 넘기더군요. 그 놈들(인신매매꾼)이 저를 다시 매하구(梅河口) 변두리의 농촌에 사는 40대 한족 남자에게 중국 돈 6천위안을 받고 팔았어요.

그 집에서 반년쯤 살았는데 파출소 공안들이 조선여자라고 잡가아가더니 벌금 3천 위안을 요구했습니다. 나를 샀던 중국 남자가 돈을 내지 못하자 투먼(圖們) 구류장을 거쳐 온성 보위부까지 강제 송환을 당했죠.

투먼 구류장에서는 신원조사를 한다며 제 옷과 짐을 모두 압수했는데, 중국 남자가 ‘꼭 살아서 다시 오라’면서 몰래 쥐어 줬던 400위안을 돌려 받지 못했어요.” 함북 부녕 축신의 서른 셋 젊은 여인 최은주 씨는 기자의 손을 잡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조선(북한) 여자들은 지지리 복도 없다”고 한탄했다.

재중(在中) 탈북자들의 ‘중국 혐오감’이 극도로 높아지고 있다. 동북 3성에 있던 탈북자들은 이들을 노리는 공안 관계자와 인신매매단의 횡포를 피해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칭다오(靑島), 따렌(大連), 텐진(天津) 등 서부 해안 도시로 모여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탈북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중국인들은 탈북 여성을 납치∙구금하다 농촌지역에 돈을 받고 팔아 치우는 인신매매 조직과 탈북자들을 검거해 뒷 돈을 요구하는 공안 관계자, 강제송환 과정에서 탈북자들의 돈과 물품을 슬쩍 가로채는 변방대 관계자들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

지린성 닝안(寧安)에서 만난 탈북자 김순녀(가명. 36세. 함북 김책)씨는 2005년 2월 두만강을 넘어 중국 난핑(南坪)에 도착했다. 도강을 도와줬던 화교가 소개해준 중국 남자를 따라 농가에 도착했을 때 3명의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1명은 조선족이었는데 “돈 많고 잘 사는 한족 남성을 소개해줄 테니 거기 가서 살아보라”며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낌새를 알아챈 김씨는 “나는 조선에 아이들을 남겨 놓고 와서 중국 남자와 살 수는 없다. 일자리를 소개시켜주면 열심히 벌어서 그만큼 돌려줄 테니 제발 한 번 만 도와달라!”며 맞섰다.

조선족 남자는 이틀 동안 버티던 김씨에게 싸늘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이 자리에서 너를 실컷 강간하고 죽여서 강물에 버려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며 김씨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떨던 김씨는 결국 그들을 따라 나섰다. 3명의 남성들에 둘러싸여 9시간 동안 택시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무단장시(牧丹江市) 아래 있는 닝안의 변두리 농가.

그들이 김씨를 44세의 한족 남성 장(長)모씨에게 넘긴 대가로 챙긴 돈은 중국 돈 5천 위안. 40년 넘게 농촌에서 살고 있는 장씨는 중국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술과 마작에 빠져 사는 장씨는 경제능력이 없다. 현재 그 집의 농사일은 대부분 김씨의 몫이다.

김씨는 “장씨가 성(性)불구자인 덕분에 밤마다 귀찮게 하는 일이 없어서 좋다”며 “기회가 되면 반드시 (나를 팔아 넘긴) 그 놈들을 찾아가서 반드시 복수 할 것”이라며 몸서리 쳤다. 그녀는 “이곳에 팔여 와서 배고픔은 면했으나, 조선(북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두 아들을 생각하면 밤잠을 이루기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다.

“파출소장이 바뀌었으니 3천 위안을 바쳐라!”

지린성 지아오하시(蛟河市) 근방의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박순영(가명. 33세. 함북 회령) 씨는 2001년 여름 현재 남편인 조선족 정모씨에게 팔려 왔다. 정씨가 인신매매 조직에서 지불한 대가는 중국 돈 4천 5백위안. 박씨가 팔려온 경위는 다른 탈북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좋은 남자’에게 팔려온 것만은 행운이었다.

정씨는 이혼 경력이 있고 박씨와 13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열심히 농사일을 하던 성실한 남성이었다. 그리고 탈북 당시 ‘미혼’이었던 박씨를 실제 아내로 대우하며 사랑했다. 마을 사람을 초대해 조촐한 결혼예식도 가졌고, 현재 5살 난 아들도 낳아 키우며 번듯한 결혼생활을 꾸려왔다.

그러나 관할 파출소의 감시와 금품 요구는 늘 이 부부의 보금자리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2001년 남편 정씨는 박씨를 맞이 하면서 관할 파출소 소장에서 중국 돈 1천5백위안을 찔러 주었다. 소장은 “모른 척 할 테니, 조용히 잘 살아보라!”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2003년 봄, 별안간 파출소 공안들이 집에 들이 닥쳐 박씨를 끌고 갔다. 박씨 면회를 위해 파출소를 찾았던 정씨는 그제서야 파출소장이 교체된 사실을 알게 됐다.

신임파출소장은 “비법 월경한 조선여자를 눈감아 주려면 윗 사람들에게 돈을 써야 하니 3천 위안을 가져 오라”고 요구 했다. 정씨는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에게 하소연해 2천5백 위안을 모아 파출소장에게 바치고 나서야 박씨를 데리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정씨는 파출소장이 3년에 한번씩 보직 이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올해 봄에 신임 파출소장이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씨는 먼저 파출소를 찾았다.

그는 신임 파출 소장에게 “결혼한지 벌써 5년이 되었고, 아내가 조선으로 송환되면 아이는 어떻게 하나”며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신임 파출소장의 답변은 “형편이 어려운 것을 이해하니 6개월에 1천원씩, 총 3천원을 바치라”고 선심쓰듯 돈을 요구했다.

박씨는 “내가 중국 법을 어기고 비법(非法) 월경한 죄가 있다는 것은 시인합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죄를 짓고 사는 것도 아니고, 결혼 못한 중국 남자와 결혼해 중국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이렇게 약점을 잡혀 어렵게 모은 돈을 뜯기며 살아가고 있느니 이것이 바로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 아니겠습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 정씨는 “1년 농사해봐야 한해 2천 위안을 손에 쥐기가 어렵다”면서 “파출소에서 하는 짓이 하도 괘씸해 아내의 중국 호구를 만들어 보려고도 했는데, 그러자면 최소 1만 2천 위안은 있어야 한다”며 고개를 떨궜다.

“억울하면 중국 정부에 제기하라!”

통상 지린성 지역에서 강제 북송되는 탈북자들이 마지막으로 거치는 곳은 중국 변방대가 관리하고 있는 투먼 구류소다. 북송과정에서 투먼 구류소를 경험했던 탈북자들은 “이곳에서는 이감 과정에서 ‘검사’를 이유로 소지품을 모두 압수한 후, 현금∙새 옷∙귀금속들을 갈취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6년 1월 투먼구류소를 통해 북송 되었던 탈북자 강혁철(가명. 39세)씨는 “투먼 구류장에 도착하자 옷과 소지품을 모두 가져갔다. 입고 있던 옷을 제외하고 중국 돈 210 위안과 시계는 돌려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6년 2월 투먼 구류소로 이감된 경험이 있는 탈북자 김선희(가명. 51세)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서 길림교도소로 넘어가게 되니 ‘이제 조선으로 끌려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이 들었다. 갖고 있던 중국 돈 160 위안을 옷소매 속에 감추고, 중국 남편이 영치금으로 넣어준 200위안으로 모두 교도소 내에서 파는 팬티, 런닝, 양말을 샀다. 그런데 도문 구류장에서 이것을 모두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연행된 탈북자들은 일단 강제북송 절차가 시작되면 현금과 속옷, 새 양말 등을 최대한 준비한다. 중국 파출소나 외사과 혹은 교도소 당국은 탈북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넣어준 영치금을 현금으로 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투먼 구류소에서 온성 보위부로 송환될 경우 현금이나 속옷, 양말은 매우 가치 있는 ‘뇌물’이 된다. 담당 조사 지도원에게 이런 것을 바치는 경우 덜 얻어 맞고, 덜 고생하며 보위부 조사를 마칠 수 있다.

하지만 투먼 구류서로 이감되면 이런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2005년 11월 강제 북송된 경험이 있는 서진숙(가명. 58세)씨는 “우리를 조선으로 넘기던 날 아침에 간수가 종이를 들고 와서 서명하라고 했다. 우리는 강제송환 되는 처지에 중국 글씨도 잘 모르니까 그냥 자기이름들을 적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종이가 우리 물품들에 대한 영수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투먼 구류소를 떠나던 날 아침에 ‘왜 우리 돈과 물건은 돌려주지 않는가?’라고 항의하니 조선족 여자 간수가 ‘우리는 당신들 물건을 보관한 적이 없다. 억울하면 중국 정부에 제기하라’면서 발뺌을 하더라”고 말했다.

“태극기를 향해 뛰어라”

재중 탈북자들의 마음 속에는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여간 높아져 있지 않다. 일하는 곳에서 월급을 주지 않는다는 하소연은 이제 부지기수다. 중국정부의 강제 북송정책이 계속되는 한 중국 공안기관과 인신매매단의 폭력과 횡포는 끊이질 않을 것이다.

중국 땅의 협박과 갈취에 진절머리가 난 동북3성의 탈북자들은 이제 칭다오, 텐진 등 중국 서부 해안지역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동북 3성을 떠나온 탈북자들은 “북한사람이라고 신고 하지 않고, 숙식도 제공하면서 일한만큼 주는 한국기업과 한국인들이 이곳에 많다”며 떠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태극기를 향해 뛰어라”는 구호는 이제 한국대사관이 아닌 한국인이 많이 모여있는 서부 해안 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한국대사관 울타리를 넘을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대다수 탈북자들에게도 새로운 ‘생존지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옌지(延吉) = 김영진 특파원k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