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비단섬 둑막이공사중 7명 아사

압록강 하구 중국 접경지대에 위치한 비단섬 둑막이(하천 따위를 막아 둑을 만드는 것) 공사 현장에 투입된 6.3청년돌격대에서 최근 두 달간 7명이 영양 실조로 사망하고, 1명이 화재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탈북자 김철욱(가명.20세)씨는 30일 중국 단둥(丹東)에서 기자와 만나, “지난 4월말 비단섬 동쪽의 둑막이 공사를 위해 6.3청년돌격대 6개 중대 1천여명이 투입되었으며, 5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돌격대원 7명이 ‘허약'(영양실조)으로 사망했고, 야영막사 화재로 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평안북도 신의주와 용천 사이에 위치한 비단섬은 북한의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신도군(薪島郡)으로 섬 하나가 군(郡)을 이루고 있으며, 2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신의주 특구 구상’이 발표되었을 때 신의주를 뒷받침하는 지리적 요충지로 거명되기도 했던 곳이다.

<6.3청년돌격대>가 이곳에 투입된 것은 여름철마다 반복되는 압록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섬 동쪽 갈대밭에 길이 1.8km의 둑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김철욱씨와의 일문 일답.

-돌격대 공사중 인명 사고는 없었나?

4월말부터 공사에 투입됐는데 5월 중순쯤에 처음으로 사람이 죽었다. 허약병(영양실조) 때문이었다.

-허약병에 걸린 사람은 귀가 조치 되지 않나?

그때는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허약병에 걸려 죽게 생긴 사람도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작업 초반기에 집에 가는 사람이 생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동요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직접 목격한 사망자는 몇 명이나 도는가?

내가 탈북하기 직전까지 7명이 허약병으로 죽어나갔다. 그리고 6월 초에 옆 중대 막사에서 불이 나서 한 명이 죽었다. 막사 불길이 올랐는데 이 사람이 나오지 못한 것이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있나?

“보상 같은 것은 없다. 허약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가족들이 와서 찾아갔다. 막사에 불이 나서 죽은 사람은 영웅 칭호를 받았다. 불이 난 중대의 중대장이 거짓말로 상부에 보고해서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막사에 불이 붙었는데 장군님의 사진을 가지러 불길을 뛰어 들었다가 변을 당했다고 보고 했다. 살아있을 때는 세끼 밥도 제대로 안주더니 불에 타죽고 나니까 영웅으로 둔갑시킨다고 그 중대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6.3 청년돌격대는 어떻게 들어갔나?

“고향은 평안북도 00군이다. 작년에 아버지, 어머니가 고기배 타고 바다에 나가셨다가 실종되셨고, 올 봄에는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나를 데리고 다니던 기지장(船主)도 죽어서 더 이상 배를 탈수도 없게 되었다. 가족도 없고 배를 탈 수도 없어 지난 4월에 6.3청년돌격대에 자원했다. 돌격대에 들어가면 밥은 먹여준다고 해서 들어갔다”

무임금 강제노동에 배고픔까지

-돌격대는 모두 지원한 사람들로 구성되나?

“아니다. 나처럼 자원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직장이 없거나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을 군(郡)별로 착출해서 나온 것이다. 직장에 세금을 못 내는 노동자들이나 부랑자 생활을 하다가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돌격대 임무는?

“6.3청년돌격대는 비단섬 동쪽에 1.8km 둑막이 공사가 임무였다.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

총 6개 중대가 있는데 전부 합치면 1000명 정도 됐다. 각 중대는 출신지역별로 구성되는데 내 고향이 00군이라 나는 00중대에 소속돼 있었다”

-작업 완료 계획은 언제까지 인가?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을 완공 목표로 잡고 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기계는 하나도 없고 죄다 사람 힘으로 작업한다.

-급여는 나오는가?

“급여는 없다. 단 숙식은 제공해 준다. 처음 3일 동안은 밥을 많이 줬다. 그런데 3일 후부터는 밥 숟가락으로 세 번 떠 먹으면 없어질 정도로 밥의 양이 줄었다. 반찬은 개도 안 먹을 걸 준다. 소금국도 없이 절인 채소라고 주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다.

-대원들의 항의가 심했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항의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폭력이었다. 각목으로 사람들을 때린다. 나중에는 때리는 것도 상습적이다. 불만이 많다고 때리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때리고, 대든다고 때리고, 엄청나게 많이 맞았다

두 달간 영양실조로 7명 사망

-대원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텐데.

“한번 돌격대에 들어오면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집에 돌아 갈 수가 없다. 원칙적으로 6.3청년돌격대는 비단섬 둑막이 공사가 끝나야 집에 갈 수 있는 것이다. 탈출을 할 수도 없다. 작업 순찰대가 수시로 순찰을 돌고 있기 때문에 작업장과 숙소 이외에는 나갈 수가 없다. 내가 비단섬에 있는 동안 비단섬에 사는 사람들과 말 한마디 못 해봤다. 거의 감옥 같은 수준이다”

-대원들의 하루 일과는 어떤가?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식사를 하고, 7시 10분 전에 모여서 작업 지시를 받은 다음 7시부터 12시까지 오전작업을 한다. 12시에 점심식사와 휴식을 잠시 취한 후 2시부터 6시까지 작업을 한다. 6시부터는 여러가지 학습과 교육을 받고 8시 정도에 중대별로 작업총화를 한다. 저녁식사는 밤 9시에 했다. 식사가 끝나면 10시 30분쯤 취침했다”

배고픔과 강제노동에 못 이겨 중국으로 탈북

-어떻게 탈북했나?

“7월 11일 밤에 같은 중대에서 일했던 사람과 비단섬에서 쪽배를 훔쳐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비단섬에는 섬 안의 순찰대와 해안선을 지키는 해안경비대가 있었는데 운이 좋게 따돌릴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배를 탔었기 때문에 물길에 능숙한 편이다”

-중국에서는 어떻게 지냈는가?

“중국에 건너와서는 예전에 배를 탈 때 꽃게 거래를 했던 중국사람의 도움으로 조개 까는 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 사람이 자꾸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바람에 중국 돈 10원을 받고 그 집을 떠났다. 낮에는 사람 많은 곳을 찾고 밤에는 불빛 밝은 곳을 찾아 걷다가 단동까지 오게 되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개인선박 소유 가능

-돌격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사실 나는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않고 줄 곧 배를 탔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배를 탔다. 그 다음에 80마력짜리 배를, 그 다음엔 120마력 상선을 탔다. 나를 잘 돌봐주었던 기지장은 내가 처음 배를 탔을 때부터 마지막 120마력 상선을 탈 때까지 계속 나를 대리고 다녔다”

-어린 나이에도 배를 타는 것이 가능한가?

“조그마한 배를 탈 때는 학력이나 나이나 크게 상관이 없었는데 80마력 배를 탈 때부터는 정식선원으로 등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중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나는 중학교에 진학은 했지만 학교에는 나가지 않아서 졸업장이 없었다. 그래서 기지장이 돈 몇 푼 주니까 학교에서 바로 졸업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배 타는데 나이나 학력이 별 상관 없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

-기지장의 배는 어디 소속이었나?

“문건상 소속은 4.25기지 소속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개인 배다. 기지와 배 출항을 관할하는 초소를 끼면 얼마든지 개인이 배를 이용해 고기를 잡을 수 있다. 기지나 초소를 낀다는 말은 돈을 몇 푼주면 된다는 말이다.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 반절이 넘는 배들이 이런 배들이다. 기지를 끼지 않고 그냥 초소에 가짜 등록을 해 놓고 운항하는 배들도 있는데 내가 일했던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배 주인을 ‘기지장’ 이라고 부른다”

고깃배 선원들 밥은 굶지 않아

-배타는 일은 어땠는가?

“내가 주로 일했던 곳은 00군 00포였다. 주로 잡았던 것은 꽃게다. 꽃게 장사가 중국과 잘되어 나중에 120마력짜리 상선도 사게 되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배를 타기는 했지만 나는 배에 흥미가 많았다. 그래서 일은 좀 힘들었지만 견딜 수 있었다. 급여는 작은 배 탈 때는 주로 쌀로 받았다.

꽃게가 많이 잡혀 장사가 잘되면 쌀 양이 많았고, 장사가 잘 안되면 쌀의 양도 적었다. 그래도 밥은 굶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자는 것과 먹는 것은 기지에서 다 해결을 해주었으니까…그러다 80마력 배를 타게 되니까 쌀 이외에 다른 부식들도 주었다. 콩기름, 설탕, 과자 같은 것도 받았다”

-큰 배를 탔을 때는 돈을 어느 정도 받았나?

“120마력 상선을 탈 때는 쌀과 부식 대신 돈으로 받았다. 한 달에 3천원을 받았다. 또 가끔은 별도로 쌀과 부식을 주었는데 이걸 장마당에 가져다 팔기도 했다. 이런 것까지 다 포함하면 한 달에 6천원정도 벌었던 것 같다. 이때는 좋았다. 친한 친구 녀석 집에 갈 때 과자나 사탕 같은 것도 사가지고 갈 수 있었고 집에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쌀도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북한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나?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때로 죽지는 않아도 허약병으로 죽는 사람이 꽤 있다. 내가 돌격대에 들어가기 전에 고향에서 놀고 있을 때는 동네에서 누가 누가 허약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과거에 비해 살기는 어떤가?

요즘은 고난의 행군 시절보다 더 힘들다. 돈 있는 사람이야 고난의 행군시절에 비해 훨씬 잘 먹고 잘 살지만, 돈 없는 사람은 그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 왜그런지 모르겠다. 작년부터 더 심해졌다”

중국 단둥(丹東)=권정현 특파원kjh@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