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공개처형 방식을 ‘공개처형’ 해야한다

북한 당국이 함경북도 청진시에 거주 중인 손정남 씨를 4월 중순 공개처형 할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해 <자유북한방송> 등 북한인권단체들이 전세계에 손씨의 처형을 막아달라는 호소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단지 남쪽으로 탈북한 동생을 만났다는 이유로 ‘민족반역자’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국가보위부 감옥에 수감된 손씨는 이미 혹독한 고문으로 만신창이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탈북한 자신의 친동생을 중국에서 만난 것이 ‘민족’을 반역한 중죄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지만, 공개처형과 관련하여서는 또 다른 개탄할 만한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남쪽에서 일어난 일이다.

민노당 대표의 죽음에 대한 ‘추상화’

올해 2월 민주노동당 대표 결선 투표에 앞서 열린 합동토론회에서, 조승수 후보는 “김정일 위원장의 ‘고문하지 말라’는 지시는 북한에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이제는 북한인권문제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조후보의 이런 주장에 대해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거론 반대’라는 기존의 민노당 입장을 지지하고 나선 문성현 후보(현 민노당 대표)는 “나는 사형제를 반대하기 때문에 북한도 사형제가 없어져야 한다. 북한이 공개처형 한다고 하는데 공개냐, 공개가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인권문제를 호도하기 위한 수많은 궤변들이 있어 왔고 문성현씨의 위 주장도 이러한 궤변 중의 하나이겠지만, 이번 주장은 특히 교묘한 사이비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손정남 씨와 같이 꺼지기 직전인 생명의 촛불을 그 어떤 바람막이로라도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선전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로 ‘패륜적 궤변’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문성현 씨의 논리에는 어떠한 조작이 숨어있을까?

그의 주장의 안과 밖을 살펴보면 “공개처형을 당하나 비공개 교수형을 당하나 전기의자에 앉거나 / ‘국가로부터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며’ / 따라서 사형제를 폐지하는 것이 공개처형에 대한 비난보다 더 중요한 문제인데 / 실은 남한도 북한처럼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으니 / 특별히 북한의 공개처형에 대해서만 비난하거나 흥분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문씨의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의 전문용어를 도입되는 것이 좋겠다.

위에 풀어 쓴 내용 중 “~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라는 표현을 철학에서는 ‘추상화(뽑아버리기, abstraction)’라고 부르며, 이 추상화는 일상생활에서도 빈번히 사용된다. 예를 들어 “수입이 월 100만원 이하인 사람”이라는 표현에서는 성별, 직업, 거주지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뽑혀지고, 추상되고) “수입이 월 100만원 이하”라는 점에서 이들을 모두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들에 대한 추상화는 우리의 관심, 이해 여부에 따라 실로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수입이 월100만원 이하”라는 추상화의 조건은 앞의 조건보다 더 구체적이며 앞에서 동일하게 취급되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 다르게 취급될 수도 있다.

만일 추상화의 차원을 더 높여 버린다면 우리는 문성현 씨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사형제도도 아무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다. 즉 공개처형, 교수형, 병사, 자연사, 사고사, 자살 등 죽음의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죽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 예컨대 사망자 통계에서는 그렇게 취급될 것이다 – 죽은 사람은 모두 동일하며, 문제는 사형제도가 아니라 불로초나 영생약을 구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공개처형은 인간성에 대한 테러행위

문성현 씨의 죽임에 대한 추상화는 ‘죄수를 어떤 방식으로 죽이느냐’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고 오로지 죄수가 ‘국가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라는 점에만 관심을 둔 후, 그것을 사형제 폐지 여부에 결부시켜 공개처형의 문제를 슬쩍 넘어가 버린 것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그러나 윤리적 문제는 사형제에만 결부된 것이 아니다. ‘죽임을 당했다’라는 점만 고려하는 것은, 그것이 ‘죽은 자만이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말이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윤리적 문제는 실은 살아있는 경우에 더 많다. 죽은 자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공개처형’에서 처형의 방식인 ‘공개성’만을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공개처형은 20세기에도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다.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마지막 공개처형은 1936년 켄터키주 오웬스보로에서 70살의 노파를 강간, 살해한 죄수를 공개 교수형에 처한 것이다. 공개처형장에서의 군중의 흥분, 증오의 바다는 단지 한 사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오판일 수도 있는 다른 사건의 배심원에게도 잘못된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감수성이 높은 사람의 경우, 공개처형을 목도하면서 느끼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혐오감은 깊은 정신적 상흔으로 남을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사형에도 여러 가지가 있듯이 공개처형도 수단과 목적에서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죄수에게 형벌을 가하는 데에 공개처형의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공포심을 조장하여 독재를 강화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히틀러는 점령지의 주민을 공개처형하고 오랫동안 시체를 공개하였다. 심지어 나찌 독일은 마을 하나를 주민과 함께 ‘공개처형’하기도 했다. 친위대 히믈러가 암살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체코의 한 마을의 모든 사람을 도륙하고 마을을 지도상에서 아예 없애 버렸다.

만일 증거가 명백했다면 강간살해범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공개처형의 경우 법률적 판단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와 제3제국 나찌 독일의 경우 공개처형은 그 수단뿐만이 아니라 법률적 정당성도 전혀 인정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적국의 국민은 물론이요 군인도 무기를 손에 쥐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적이 아님은 국제법적 당연이요, 마을 전체를 공개처형한다는 것, 어린아이, 부녀자들을 포함하여 마을 주민 모두를 죽인다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화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러한 공개처형과 강제수용소의 존재가 전체주의 국가의 판별기준임은 이미 독일 출신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가 밝힌 바이다.

손정남씨에 대한 ‘비공개’ 처형에도 반대한다

북한의 공개처형은 심문과정에서의 악질적 고문, 형식적 재판, 그리고 처형에 이르는 기간 중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든 비인간적 취급, 친지들과 불쌍한 군중 앞에서 당하는 시신모독 등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것은 북한의 공개처형이 단지 죄수에 대한 형벌이 아님은 물론 실은 그에 대한 복수로도 설명될 수 없음을 방증한다. 그것은 군중통제를 위한 ‘국가테러행위’다.

타인에 대한 폭력이 타인을 설득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것처럼, 그 역으로 북한에서의 공개처형이라는 폭력은 그 죄목이 무엇이든 마치 히틀러의 공개처형처럼 국가가 인민을 법적, 사회적으로 설득할 수 없음을 말하며 따라서 어떤 정당성도 부여받을 수 없다.

손정남씨의 경우, 우리가 공개처형을 반대하고 저주하는 것이 그를 비공개리에 처형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북한은 이미 사법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국가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를 그 어떤 방식으로 처형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 북한은 ‘민족반역’보다 더 상위개념인 ‘인간성에 대한 범죄’를 손정남씨에게 저지르고 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손정남씨의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