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포커스] 김일성 장군과 눈썰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주민들이 김일성 사망(7월 8일) 24주기를 추모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쳐

북한을 연구하기 시작한 해에 받은 첫 과제가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관한 정치역사학적 평가’였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과제가 주어졌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왜일까. 북한 정권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이원화되어 더는 신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상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동북지역의 많은 학자와 조선 민족과 교류하면서 문자화된 기록이 하나씩 시각화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억의 저 편으로 몰아넣었던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탈고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보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료(史料)에 목말라 있던 필자는 당시 동북항일관병의 총지휘를 맡았던 주보중(周保中)의 일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주보중의 일기는 1910년부터 해방까지 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동북지역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주보중은 하루로 빠지지 않고 당시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과 88여단의 세세한 이야기까지 모두 정리⋅기록하였다. 그 중에서 필자의 이목을 끄는 부분은 김일성이 이끌었던 조선민족관병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보중이 본 김일성과 조선민족관병들은 어떠했는지, 당시 전세에 대한 투쟁은 정말 필자가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지 궁금하였다. 특히 1942년 8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3년 남짓한 기간에 소련원동군 제88여단에 대한 중국의 연구는 상당히 많이 있었고, 몇몇의 전문가도 존재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이 여단 내 조선민족관병에 대한 논저는 찾아보기 극히 힘든 실정이다. 해외에 관련학계에서조차 일반적으로 이 부분을 터부시하였다.

상대적으로 평가가 덜 이루어진 조선민족관병의 3년 남짓한 시간으로 인해 북한을 ‘미지의 국가’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그 중에 중요한 논쟁거리는 항일연군 교도여단(1942년 7월 조직, 周保中) 내 조신민족관병의 비중과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군에서 영도자가 된 이유이다.

이에 대한 많은 설들이 존재하는 것은 연구가 미진하게 이루어진 연유도 있겠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거나 여러 곳으로 분산된 탓도 있다. 우선, 항일연구 교도여단 내 조선민족관병의 비중에 대한 주장들(400명설, 280명설, 140명설, 180명설, 100명설, 99명설, 78명설, 60여 명설)이 존재하나 1943년 2월에 작성된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에 의하면 조선민족관병은 남자 137명, 여자 30명으로 총 167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주보중의 일기와 함께 확인하면 1945년 8월 25일 소련원동군 위이린 소장이 제출한 ‘조선인 103명설’과 이완노브의 ‘조선인 78명설’을 고려해볼 때 당시 항일전쟁시기에 교도여단 내 조선민족 현역관병은 100명 정도로 보인다. 그 이외에 후방사업을 한 나머지 병사와 여성까지 포함하면 160명 정도로 생각된다. 이 수치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광복 이후 평양으로 귀국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조선을 세우는 창단 멤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현재 몇 명을 제외하고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혀있기도 하다. 김정숙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로 7명씩 총15명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 행을 이루고 있다.

또 다른 의문은 2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김일성이 어떻게 군의 주요한 영도자가 되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원래 88여단은 중국과 소련 그리고 조선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성격을 띤 군체로써 각각으로 나누어진 지역으로 분산되어 활동하다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스템을 지녔다. 김일성이 최용건과 김책 등의 길동 지역과 북만의 주요한 영도자들을 만난 것도 이때이다. 주보중에 의하면, 조선민족관병 중 제1로군 출신자가 60%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김일성이 직접 거느린 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938년 7월 미국에서 발행된 조선민족신문에도 소개되었고, 1941년 12월 15일 중국 화북의 조선청년연합회 대회에 김구와 함께 소개될 정도였으니 전투능력이 상당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당시 동북지역의 환경과 열악한 전투조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점은 인정할만하다. 게다가 주보중은 김일성이 여단 내 중국과 소련 동지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전한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 남부와 압록강 동쪽 등 지역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전투역량과 러시아어 학습능력 등을 포함해 당시 조선민족관병을 총지휘한 주보중이 ‘가장 훌륭한 간부’로 그를 평가하였다.

필자가 제기한 두 가지 의문점(88여단의 조선민족관병의 구성비율과 젊은 나이에 김일성이 영도자가 된 이유)은 지금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정권 수립 70주년을 ‘대경사’로 기념할 것을 예고한 바 있다. 이렇게 북한 정권이 9⋅9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해온 이유는 국가 수립의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북한이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만든 위성 정권이라는 어느 언론의 논설은 이원화된 프레임의 산물인 셈이다. 때로는 프레임을 찾지 못해 수많은 논문과 씨름을 하지만 고착화된 프레임은 관점의 사각지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한 주보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간에 떠들썩했던‘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한 국내의 반응을 비추어본다. 필자가 속한 대학은 김일성종합대학과 70년의 인연의 시간이 있는 곳이다. 그러한 곳에서도 북한 학자들과의 학술행사를 조직할 때에도 최소한 6개월 전부터 부산하게 일정과 규모를 조정한다. 생소할 정도로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에 불참 통보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답방은 이에 비할 수 없지만, 이를 대하는 우리의 다양한 반응을 보면서 ‘이원화된 프레임’이 상기되는 것은 왜일까.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을 내려온다는 것은 서울에 수소탄이 떨어지는 것 이상의 위력을 과시할 것이다. 그 위력이 나쁜 것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일 수도 있는 불확실성만큼의 기폭제가 전 세계의 TV를 장악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을 연내에 답방한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은 북한의 강경파들에게만 그 이유를 돌릴 수 있을까? 김정은 위원장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조율이 마무리된 상태에 서울을 답방해도 늦지 않을 것이며, 그 준비가 김 위원장에게도 정치적 명분을 확보하면서 부담을 덜어줄 것이다.

이미 호랑이 등에 탄 사나이들에게 현실의 무게를 쉽게 예측할 수 있음에도 필자는 70년 전 그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장군이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듯이, 김정은 위원장이 산타에게 루돌프의 눈썰매를 빌려 타고 서울을 내려오길 바란다. 그것이 김정은 위원장이 바라는 새로운 역사가 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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