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바로보기, 헬무트 콜의 유럽葬과 업적

2017년 7월 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거물 정치인들이 모였다. 6월 16일 87세로 세상을 떠난 헬무트 콜의 장례식 때문이었다. 장례식은 유럽장으로 스트라스부르 소재 유럽의회에서 거행됐다. 관에는 유럽기가 덮여져 있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는 유럽의 심장이다. 독일 정치인으로 유럽장은 역사상 최초다. 그의 업적이 독일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장례식에는 메르켈 총리를 비롯해 마크롱 대통령, 융커 EU 집행위원장, 메드베데프, 클린턴 등이 참석해 추모연설을 했다. 무엇보다 메르켈의 연설이 여운을 남긴다. 콜의 존재가 독일인은 물론 유럽인에게 행운이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각하, 당신이 없었다면 1990년까지 장벽 저편에 살던 동독인들의 삶은 전혀 다르게 펼쳐졌을 것이며. 물론 나의 삶도 그랬을 것입니다. 헬무트 콜 총리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베풀어준 기회, 당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준 기회, 우리 독일인이자 유럽인인에게 열어준 기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Ohne Helmut Kohl wäre das Leben von Millionen Menschen, die bis 1990 hinter der Mauer lebten, völlig anders verlaufen – natürlich auch meines. Lieber Bundeskanzler Helmut Kohl, dass ich hier stehe, daran haben Sie entscheidenden Anteil. Danke für die Chancen, die Sie mir gegeben haben. Danke für die Chancen, die Sie vielen anderen eröffnet haben. Danke für die Chancen, die wir als Deutsche und Europäer durch Sie erhalten haben. Sie haben unendlich viel erreicht.)

장례식을 마치고 운구는 헬리콥터 편으로 콜의 고향인 독일 루드비히스-하펜으로 떠났다. 시내를 일주하며 주민들과 작별을 나눈 운구차는 인근 슈파이어 지역으로 이동했다. 장례미사를 위해 슈파이어 성당에 도착한 고인의 관에는 독일기가 덮여져 있었다.

콜의 최대 업적은 통일이다. 홀로코스트의 주역, 전범국의 오명으로 늘 국제사회의 주변 만 맴돌던 독일이 통일과 함께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나치 트라우마에 짓눌린 현대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주변국 지위를 벗고 단숨에 중심국가로 거듭난 것이다. 통일 전 베를린마저도 전승국의 허가를 얻어 손님 자격으로 방문해야 했던 독일이 이제는 EU 총 GDP의 40%를 차지하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푸틴이 크림 반도를 공격했을 때는 메르켈의 주도 하에 대러 제재안을 마련할 정도로 정치적 입지도 강화되었다.

다음은 시대별로 살펴본 콜의 업적이다.

첫째, 1983~84 대동독 차관과 상호주의이다. 사민당 동방정책에 대한 기민련의 전통적인 반대 기조를 수정, ‘접근을 통한 변화’에 상호주의를 접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집권 초기 2년 동안 대동독 차관 19.5억 마르크를 제공한 대신, 반대급부로 국경 400km 길목마다 설치되었던 71,000개의 자동기관단총을 제거한 것이다.

둘째, 1983년 퍼싱 II의 실전 배치다. 1982년 총리에 선출된 콜은 퍼싱 II를 반대하는 평화운동과 많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핵미사일 SS-20에 맞설 퍼싱 II를 배치했다. 당시 평화운동 규모는 150만 명을 넘었고 인간띠는 무려 108km에 달했다. 이 갈등으로 나토 이중결의안을 채택했던 사민당 슈미트는 당내 갈등이 심화되어 연정이 파기되고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어 총리직을 물러나야 했다.

더욱이 퍼싱 II는 사드와 달리 10분 내 모스크바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공격 무기였다. 이런 콜의 결단에 연방의회도 贊286 대 反225로 지지해 주었다. 콜은 2009년 11월 9일 뮌헨에서 개최된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행사’에서 “퍼싱 II 배치가 실패했다면 베를린 장벽도 건재했을 것이고 소비에트 연방도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위 독일판 사드논쟁이다.

셋째, 1989년 드레스덴 연설이다. 드레스덴 연설은 12월 18일 콜 총리가 동독 땅을 방문해 직접 주민에게 던지는 최초의 메시지였다. 베를린 장벽이 해체된 지 40일 만의 일이었다. 콜의 행보가 통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했던 주변국들의 견제가 느껴졌다. 그의 연설 하나하나에 집중, 꼬투리 잡을 태세였다. 실수 하나로 통일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콜 총리가 보좌관 텔칙에게 연설을 취소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였다.

심사숙고로 밤을 지새운 콜은 ‘헬무트!’를 연호하는 동독인들을 향해 “여러분, 자유없는 평화는 가짜입니다. 동독의 자유를 위해 싸우시고 투쟁하십시오. 우리가 함께 할 것입니다”고 연설했다. 통일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지만 통일보다 더욱 강력하고 귀중한 메시지와 가치를 전달했다. 어느 덧 월요데모의 구호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었다.

넷째, 1990년 3월 동독 민주정권 창출이다. 콜은 1989년 동독 무혈혁명으로 공산권력을 잠재운 시민의 힘을 민주화를 위해 결집, 1990년 3월 18일 동독 땅에 최초의 자유선거를 실시토록 했다. 선거 결과 기존의 공산정권은 퇴출되고 동독 기민련의 드메지어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콜은 드메지어 정권과 화폐, 경제, 사회통합을 체결하고 통일조약을 완성했다.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이루었다.

다섯째, 1990년 5월 동서독 화폐통합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동독인의 대량탈출이 본격화했다. 1989년 한 해, 344,000명을 수용한 서독에 1990년 3월 말까지 184,000명이 들이닥쳤고 시간이 흐를수록 탈출행렬은 가속화할 전망이었다. 탈출자 대부분은 청년, 지식인, 기능인력 등으로 동독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콜은 결국 화폐통합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실질가치가 1/4에도 못 미치는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화폐와 1:1로 교환한다는 정책에 대부분 경제학자들이 반대했다. 칼 오토 푀엘 연방은행 총재는 화폐통합에 반대해 사임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독일은 당시 콜의 화폐통합은 단순한 포퓰리즘이 아닌 대량탈출 등 여러 부작용을 해결한 유일한 대안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동독 주민들은 분단 시절 베를린-서독 구간을 막강한 서독의 경제력과 마르크를 직접 목격해왔다. 이들이 동독 공산정권을 제압하고 서독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Wenn DM nicht zu uns kommt, dann kommen wir zur DM” (만약 서독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 마르크화를 찾아갈 것이다)는 구호는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던 동독인들의 당연한 요구였던 셈이다.

화폐통합은 이런 상황 속에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신의 한 수’였다. 화폐통합으로 동독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줄 도산했다는 좌파 세력들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어차피 경쟁력이 없었던 동독기업의 도산은 예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1990년 7월 독소 코카서스 회담이다. 독일통일의 최대 장애는 소련이었다. 미국과 영국은 통일된 독일의 나토 잔류와 같은 조건을 내세우며 소련이 독일통일에 동의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해 갔다.

코카서스 회담은 불신이 가득한 소련의 우려를 풀어준 서독의 외교적 성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지고 있었다. 기존 공산 엘리트들과의 샅바 싸움에 이어 경제침체로 국민들마저 고르바초프에게 등을 돌리는 상항이었다.

콜은 이런 고르바초프의 든든한 지원자를 자처했다. 500억 유로 상당의 차관을 제공하고 여러 전문가들로 하여금 그의 개혁 정책을 자문토록 배려해 주었다. 이런 콜의 정성이 코카서스 회담으로 이어졌다. 회담은 통일은 독일 민족의 자율적 결정에 따라 가능하다며 전범국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어떤 정치인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 회담에 따라 독일은 통일과 함께 주권의 완전한 회복이라는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미테랑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우주질서가 바뀌는 혁명과 같은 변화”를 목도하게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코카서스의 기적이었다.

코카서스의 기적은 독일에 국한하지 않는다. 독일통일의 기적을 넘어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로 대변되는 동서 갈등과 대립을 풀어내는 유럽 현대사 최대의 업적이다.

다음은 8개 합의내용이다.

1) 독일 통일은 서독, 동독 및 베를린 시를 포함한다.
2) 통일과 함께 독일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전승국의 권리와 책임은 완전 소멸된다. 독일은 통일과 함께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
3) 통일된 독일은 국가의 무제한적 주권을 행사하며 외국과의 동맹 체결에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이 선언은 유럽안보협력협의회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서독은 통일된 독일이 북대서양동맹(NATO)에 잔류하기 원하며 동독도 동의할 것으로 확신한다.
4) 통일 독일은 소련과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철수에 관해 협상, 독소 조약에 따라 철군한다. 소련군은 3년~4년의 과도기를 두고 철수한다. 독소 양국은 동독에 서독 마르크화 도입을 위한 과도기 조약을 체결한다.
5) 소련군이 동독 영토에 잔류하고 있는 한, 나토의 동독 확대는 불가하다. 이에 따라 나토 조약 제5조와 6조(나토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인정하고 공동의 대응조치를 취한다는 조항)은 불변한다. 서독 연방군은 통일과 동시에 동독과 베를린에 주둔한다.
6) 동독 영토에 소련군이 잔류하는 한, 미영프 3개 연합군은 통일 후라도 서베를린에 주둔한다. 서독 정부는 연합국에 이를 요청하고 각국 정부와 관련 조약을 체결한다.
7) 서독 정부는 진행 중인 빈(Wien) 회담(당시 독일문제에 대한 국제회의)에서 통일된 독일의 군대를 3~4년 내에 37만 명으로 감축한다는 의무사항을 공표한다. 군대 감축은 빈 협정의 발효와 함께 실행된다.
8) 통일 독일은 핵, 화학, 생물무기 제조, 보유 및 처리를 포기하고 비확산 조약(NPT) 회원국으로 남는다. 독일은 통일의 대가로 주변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항을 둔다.
이 외에도 독일은 폴란드와의 국경인 오더(Oder) 나이스(Neiss) 국경을 문제시 삼지 않을 것도 공개적으로 확인해주었다.

일곱째, 통일독일 재건에 동독 인재를 등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메르켈, 가우크 등이다. 메르켈은 1954년 출생 직후 목사인 부친을 따라 동독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라이프치히 칼 마르크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메르켈은 오히려 사회주의 인문사회과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1989년 동독 무혈혁명 당시 ‘민주봉기’의 대변인을 지냈고 콜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통일 후 1990년 12월 2일 치러진 첫 선거에서 연방하원에 당선되었고 콜의 정권 하에서 여성‧청소년 장관, 환경부 장관, 기민련 사무총장의 직을 수행했다. 2000년 4월에는 기민련 당 대표로 선출되었고 2005년에는 연방총리 후보로 나서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현재 12년 째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오는 9월 4선에 성공하면 재임기간 16년으로 별 문제가 없다면 콜 총리와 타이 기록이다.

요하임 가우크(Joachim Gauck)는 동독 목사로 뉴포럼에 참여해 무혈혁명을 이끌었다. 1990년 6월에는 슈타지 해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통일 후 슈타지 문서관리청(일명 가우크청) 대표로 선임됐다. 2012년 3월 18일 11대 대통령에 선출, 지난 2017년 3월 18일 5년 임기를 마쳤다. 또한 시민운동가 마리안네 비어틀레도 슈타지 문서관리청 가우크 청장으로 발탁한 바 있다.

이 밖에도 사민당이 발굴한 인재도 있다. 통일 직후 브란덴부르크 주 총리에 선출된 사민당의 만프레드 슈톨페(Manfred Stolpe)다. 개신교 장로로 동독 시절 대부분을 동독 개신교 연맹 사무총장과 부총재로 활동하며 정치범들을 돕고 서독으로 이주시킨 인물이다. 그는 1990년 브란덴부르크 주지사에 당선돼 2002년까지 활동한 후 연방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사민당으로 연방하원 의장을 지낸 볼프강 티에르제(Wolfgang Thierse)는 동독 튀링겐 주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훔볼트 대학에서 독문학과 문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대학 연구소에서 활동하다 문화부로 이직했다. 문화부에서 일하던 1975년에, 그는 동독 반체제 인사 비어만(Biermann)의 시민권 박탈에 서명하라는 지시를 거부해 퇴직해야 했다. 동독 무혈혁명 때는 뉴포럼에 참여해 활동하다 동독 사민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 6월 9일에는 동독 사민당 대표로 선출됐고 통일 후 동서독 사민당 통합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됐다. 티에르제는 1998~2005년까지 연방하원 의장, 2005~2013년까지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이 통일 후 독일은 동독 무혈혁명을 이뤄낸 시민운동가들을 키워 정치무대에 데뷔시켰다. 다른 한편 이것이 독일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통일 후 오시즈-베시즈 하며 동서 갈등과 같은 부작용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독일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일련의 콜 총리의 업적은 ‘하나의 독일-하나의 유럽’이라는 큰 틀 속에서 추진된 것으로 1989년 11월 26일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소개한 ‘10개항 프로그램’에 기본 방향이 소개되어 있다. 독일문제 해결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은 콜의 외교안보 특보 호르스트 텔칙이 고르바초프 특사 니콜라이 포르투가로프를 만난 후 전격 작성되었다.

1989년 11월 21일, 베를린 장벽이 해체된 지 3일 만에 본을 방문했던 포르투가로프는 동독 공산정권의 미래를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기정사실화하고 향후 독일의 일정을 소련의 국익과 연결시키려 애를 썼다. 이 모습을 직감한 텔칙이 콜에게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호기라며 콜의 통일의지를 자극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탄생한 것이 ‘10개항 프로그램’이다.

콜은 이 프로그램을 최측근 겐셔 외무장관에게도 숨긴 채 작성, 11월 28일 의회 연설을 통해 발표하는 강수를 뒀다. 타이프는 아내 한네로레 여사가 직접 담당했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의 동의를 얻어내고 폴란드 등 주변국들의 거부감을 해소해 1990년 10월 3일 통일독일이 완성되었다.

‘통일의 아버지’, ‘大 독일인’, ‘大 유럽인’, 마지막 떠나는 콜에게 붙여진 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