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김정일 시대에 절대적 忠臣이었던 최현

지난해 12월 14일 노동신문에는 ‘우리는 김정은 동지밖에 모른다’는 정론이 실렸다. 그 요지는 이틀 전의 장성택 사형 집행을 정당화하며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었다.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잔인하게 처형했다는 사실은 김정은이 주변 인물들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권력기반이 여전히 취약하고 홀로서기를 하지 못한 김정은은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견지하는 부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절실함은 롤 모델(roll-model)의 창출로 나타났다. 북한 정권은 꺼져가는 백두혈통의 신화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는 절대 충신의 등장을 의도했던 것이다. 김정은 시대로 접어들면서 권력의 2인자로 떠오른 이가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다. 그 부친인 최현(崔賢)이 김일성 시대에 보여줬던 절대 충성과 복종심을 다시 불러일으켜 김정은에 대한 무한 충성의 본보기로 삼게 만들려는 시도가 북한에서 일어났다.

12월 14일자 노동신문 정론은 ‘누가 감히 우리 수령님을’이란 대목을 언급하며 “어제날 종파 나부랭이들의 숨통에 권총을 들이대고 불을 토했던 투사들의 외침소리는 결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누가 감히 우리 수령님을’이란 표현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민족보위성 부상이던 최현이 당 중앙위 전원회의장에서 권총을 뽑아 들고 박창옥 등 ‘소련파’와 윤공흠, 서휘 등 ‘연안파’를 위협하면서 던진 말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선 현재 최현과 같은 절대 충신들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최현의 아들인 최룡해도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의 2주기 추모행사 결의 연설에서 “우리 혁명무력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며 “그 어떤 천지풍파 속에서도 오직 한분 최고사령관 동지만을 받들어 나갈 것”이라고 김정은에 대한 충성맹세를 했다. 최룡해는 하루 전인 16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광장에서 열린 인민군 충성맹세 모임에서도 전체 인민군을 대표해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당시 충성 맹세에서 “1950년대 준엄한 시련의 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권위를 헐뜯으려는 반당분자들을 가차없이 쏴죽이겠다고 추상같이 외치며 권총을 뽑아들었던 항일혁명투사들을 본받아 김정은의 영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처단하겠다”고 했다. 최룡해가 언급한 ‘권총을 뽑아들었던’ 항일혁명투사는 자신의 아버지인 최현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최근 북한에서는 2인자의 권좌에 오른 최룡해뿐 아니라 그 아버지인 최현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12월 20일 노동신문은 ‘백두 영장(靈將)의 역사의 자욱은 어디서나 보인다’라는 제목의 글을 2면 전면에 실었다. 이 글은 최현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최현이 김정일을 수행할 때 그림자도 밟지 않을 정도로 충성을 다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또한 최현이 김정일 시대에는 아들뻘인 김정일을 충직하게 받들었다고 치켜세웠다. 최현은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함께한 동료로 김일성보다 나이도 많고 빨치산으로서 명성도 더 높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서는 항일무장투쟁과 그 이후 북한 정권의 역사에서 나타난 최현의 족적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정립해 보고자 한다. 김일성의 수많은 심복들 가운데 최현은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항일무장투쟁 시기와 그 이후 김일성 시대에 있어 최현은 과연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을까? 이와 같은 물음이 이 글이 지니고 있는 주된 문제의식이다. 이 글에서 주로 동원하고 있는 사료는 최현의 회고록인 ‘혁명의 길에서’ 와 ‘항일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 그리고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료들은 북한에서 발간된 저서이기 때문에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왜곡, 조작된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 밖의 다양한 1차 자료 및 2차 자료들(예컨대 와다 하루끼 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등)과의 교차확인을 거치는 작업을 거쳐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인간적이고 의리를 중시했던 성품

일반적으로 최현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의 싸움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그러나 최현은 물리적인 전투능력뿐 아니라 전투의 전략전술에까지 능란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적이고 의리있는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 점은 김일성의 회고록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중략) 그는 군사에만 밝은 것이 아니라 정치에도 역시 밝은 지휘관이였다. 그후 수십 년간의 사업과정을 통하여 나는 그가 군사작전의 능수일 뿐 아니라 자기 식의 일가견을 가진 무게 있는 정치활동가라는 것을 확고히 파악하게 되였다. 그는 유능한 군사작전가인 동시에 로숙한 정치일꾼이자 세련된 선동가이기도 하였다. 최현은 군사외교에도 능숙하였고 적군와해공작도 잘하였다. 그가 장악한 만주국의 군경들은 인민혁명군부대에 계통적으로 탄약과 무기를 공급해주고 적정도 수시로 통보해주었다. 최현을 싸움꾼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근시안적인 평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중략) 그가 지니고 있던 인간적매력을 더 충실하게 전달하자면 무슨 이야기를 더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초연에 걸고 비바람에 고삭은 그의 자서전은 너무나도 많은 사연들과 사변들로 가득차 있다. 최현은 일평생 비관을 모르고 살아온 락천가였으며 어떤 폭풍속에서도 드놀지 않고 곧추 앞으로만 돌진해온 탱크와 같은 사나이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들은 어떤 형의 인물들이였던가? 솔직한 사람, 단순한 사람, 근면한 사람, 대담한 사람, 성실한 사람, 통이 큰 사람, 뒤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 필요한 결심을 내릴 줄 아는 사람…그는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그가 제일 싫어한것은 아첨쟁이, 비겁쟁이, 건달뱅이, 수다쟁이였다. 그는 주머니를 12개씩이나 가지고있는 사람들과 꺼풀을 12개씩이나 쓰고 사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하였다.”— 김일성,’세기와 더불어 4′ (조선 로동당 출판사, 년도 불명), 5. 백전로장 최현 파트.

북한군 정치장교로 35년을 복무했던 장용철 씨의 회고록에는 최현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 산재해 있다. 그 내용들이 말해주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일자무식의 거친 성격을 지닌 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략) 최현은 6·25 전쟁 시기 후퇴길에 올라 김일성이 있는 자강도 땅으로 들어가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밤중에 산 속에서 불도 피우지 못하고 새우잠을 잘 때에도 다른 대원들이 다 잠든 후에 조용히 일어나 자기가 덮고 있는 담요와 자기 외투까지 대원들에게 덮어 주고, 식량이 떨어져 먹을 음식이 없으면 자기 손으로 대원들과 함께 버섯과 산나물도 함께 뜯어먹은 사람이다.”— 장용철, ‘북한을 움직이는 사람들: 북한 권력가의 인맥’ (참세상닷컴, 2003), p.96.

최현의 운전기사였던 전용만 씨가 기억하고 있는 최현에 관한 기억도 그의 성품과 인간성을 잘 말해준다.

“한 번은 최현과 함께 자강도의 어느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 농가에는 50대의 부부가 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집이 크기는 하지만 단칸으로 되어 있었다. 손님들이 왔는데 함께 잠자기가 죄송하다면서 방 가운데를 흰 천으로 막고 자게 되었는데, 운전기사인 전용만이 아랫목에 누운 25세의 예쁜 처녀를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최현이 정신없이 자는 듯하자, 전용만은 손을 더듬어 처녀가 누운 쪽으로 다가가다 그만 흰 천을 잡아당겨 확 벗겨지게 되었다. 잠을 자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흰 천이 떨어지자 모두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정말 다급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있던 최현이 ‘동쪽에 섬광!’을 외치며 운전기사의 등을 덮치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하던 주인에게 최현은 방금 밖에서 폭탄이 터져 섬광이 일었다고 재치 있게 둘러댐으로써 전용만을 망신스러운 위기로부터 구해 주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의 어느 날 최현이 운전기사 전용만한테 새 군복을 입으라고 하더니 자강도로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곳이 몇 해 전의 바로 그 집이었다. 그날 농가를 찾아간 최현은 그 집 식구들 앞에서 그날 밤 이야기를 하며 딸을 우리 운전수에게 맡기라고 설득하여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장용철, ‘북한을 움직이는 사람들: 북한 권력가의 인맥’ (참세상닷컴, 2003), p.98~99.

이렇듯 최현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최현이 일자무식의 싸움꾼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이라기보다는 인정 많고 순수하며 상황 판단이 빠른 유능한 군인이라고 평한다. 특히 그가 20대의 7년을 보낸 연길 감옥에서의 일화에서는 조폭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류의 의협심 강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군벌당국이 길림 제4감옥이라고 부르던 연길감옥에서 최현에 의해 빚어졌고 그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옥중일화들과 아슬아슬한 모험담들은 동만의 모든 유격구들에 널리 알려지였다. 최현의 옥중생활은 먼저 감방의 ‘제왕’인 ‘깡툴’과의 대결로부터 시작되였다. 그가 들어간 감방의 ‘깡툴’은 죄수들을 학대하는데 이골이 난 살인강도범이였다. 새 죄수들이 감방에 나타날 때마다 그자는 그들의 물건을 있는 대로 강탈하여 자기의 소유로 만들군하였다. 음식이 들어오면 남들의 몫까지 빼앗아서 자기의 배를 채웠다. ‘깡툴’에게 버릇을 가르쳐주기로 결심한 최현은 어느날 ‘칼’표 고급담배를 한대 물고 감방안의 다른 죄수들에게도 한 대씩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깡툴’에게만은 일부러 권하지 않았다. 이것은 ‘깡툴’의 약을 올려주기 위한 무언의 도전이였다. 심사가 꼬인 ‘깡툴’은 최현이더러 가지고 들어온 물건을 자기한테 모조리 바치라고 을러메였다. 최현이 대답대신 한입 가득 물고 있던 담배연기를 구름처럼 내뿜자 참을성을 잃어버린 ‘깡툴’은 손찌검을 하려고 덤벼들었다. 최현은 몇 사람의 머리 위를 날아 넘어 수갑을 찬 두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답새긴 다음 이렇게 호통쳤다. ‘네 이놈, 내가 누구라고 감히 허튼 수작질을 하는 거냐? 네놈이 밖에서 살인을 치고 감옥에 들어와서도 불쌍한 형제들을 못살게 구니 너처럼 포악하고 죄 많은놈이 어디 있겠느냐, 너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평민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냐? 이번만은 관대히 용서하니 앞으로는 처신을 잘해야겠다. 이제부터는 네가 저 아래목 변기통옆으로 내려가라. 이 웃자리는 내 자리다.’ 최현을 당해낼 수 없다고 자인한 ‘깡툴’은 그가 시키는 대로 변기통옆에 가서 무릎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깡툴’의 억압에서 해방된 죄수들은 그후부터 모두 최현을 은인으로 섬기고 따르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세기와 더불어 4’ (조선 로동당 출판사, 년도 불명), 5. 백전로장 최현 파트.

요컨대 최현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비’의 이미지만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의협심이 강하며 의리 있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항일무장투쟁 당시의 최현의 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위상을 재평가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