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南말투 유행…‘동무’ 아니죠∼‘자기’ 맞습니다!

▲ 평양 인민대학습당 전경. 북한의 대학생들은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몰래 만남을 갖는다. <자료사진>

<평양시 모 대학에 다니는 한영민(가명)은 여자 친구와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은 그가 헐레벌떡 달려오자 여자 친구는 “영민, 왜 이렇게 늦은거야?”라고 물었다. 영민은 여자 친구에게 “자기야, 미안해”라고 말하며 옆자리에 슬그머니 섰다. 그런데 마침 정문 앞에 나와 있던 대학 담당 보안원(경찰)이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이 보안원이 듣기에 두 남녀 학생의 대화는 북한 말씨가 전혀 아니었다. 보안원은 이들이 남한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말씨를 따라한 것이라고 판단해 두 사람을 단속하기 위해 다가가서 소리쳤다. “야, 너희들 지금 뭐 하는거야?” 순간 그 자리에 정적이 흘렀다. 보안원도 남한 말씨를 사용한 것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북한의 젊은 층 사이에서 한류(韓流) 열풍이 거세게 불며 남한식 말투를 따라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를 단속하기 위한 당국의 움직임도 강화되고 있지만 단속 주체인 보안원과 보위부원들도 남한 드라마나 영화를 몰래 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위 사례는 북한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있는 한류와 관련된 대표적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북한의 대학생들은 서로를 ‘XX동무’ 또는 ‘XX동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이 여대생은 자기 남자 친구를 ‘영민’하고 불렀다. “왜 이렇게 늦은거야?”에서 ‘거야?’도 남한식 말투이다.

영민의 대답에서 ‘자기야’라는 말도 북한 주민들은 전혀 쓰지 않는 말이다. 또한 북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미안함을 표현할 때 ‘안됐다’라고 말한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은 남한식 표현이다.

평양 소재 대학을 다니다 탈북한 정인구(25세) 씨는 “북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남한 드라마를 보고 남한 말씨를 따라하는 붐이 불고있다”며 “대학 담당 보안원들이나 보위원들은 남한 말씨를 쓰는 학생들이 남한 드라마를 본 것이라 추정하고 이들을 잡아다가 문초(조사)하고는 했다”고 말했다.

정 씨는 “그러나 단속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압수한 남한 드라마 중 일부를 빼내어 몰래 보고 있다”며 “겉으로 아무리 단속을 쎄게(강하게) 해도 남한식 문화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유행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학생 뿐 아니라 대학 교수까지 남한식 말투를 사용하다가 당국에 적발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북 지원단체 ㈔좋은벗들은 지난 19일 배포한 소식지에서 “평양시 김형직 사범대학의 한 여자 교원(교수)이 수업을 하던 중 한국 말씨로 이야기를 하다 문제가 됐다”며 “이 교원은 학교 운동장에서 군중집회 투쟁을 당했고 결국 교원 자격까지 박탈당했다”고 전했다.

소식지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CD를 즐겨봤던 이 교원은 부드럽게 말하는 한국 여성들의 말씨가 듣기 좋아 평상시에도 친구들끼리 농담 삼아 자주 한국식 말투를 따라했다”며 “수업 중에 우스갯말로 한국 말씨를 사용하다 단속에 걸렸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소식지는 “최근 일부 청년들이 유행이라면서 한국식 바지를 입고 다닌다”며 “함흥, 평성, 평양, 신의주 등의 주요 도시에서 한국식 바지와 중국식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단속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FP)도 지난달 “최근 북한에서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 DVD를 밀수해 주민들끼리 돌려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북한 사회에 한류가 침투하면서 북한 정권이 비상에 걸렸다”고 보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