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술 잘 배워 조국에 널리 전파하겠다”

▲ 광명성무역회사 본사 배경으로 관계자들과 함께한 모습 ⓒ데일리NK

엘칸토 중국공장 북한 노동자 연수단 귀국을 앞두고 향후 거쳐야 할 과정을 따져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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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단 귀국 후속조치와 공장 시설물 평양도착, 엘칸토 기술자들의 방북에 대한 일정과 세부사항에 대한 의견조율, 시설물에 대한 보상과 제품형태별 임가공에 따른 단가협의, 단계별 추가 시설물 반입에 따른 협조 사항, 평양공장에서의 직접기술지도 방법 등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태산 같다.

1997년 9월 29일. 서울 본사에서 반가운 연락이 왔다. 평양으로 보낼 시설물(기계)의 선적일정을 알려온 것이다. 보내온 일정에 따르면 8일 인천항에서 기계선적 후 오후에 출항해서 다음날 남포에 입항할 예정이다. 13일 경에 필자가 평양을 가게 돼있고, 14일 만경대 구두공장에 기계가 들어간다.

이제 남은 일은 평양 가기 전에 투자형태에 대한 내부 결정을 해야 한다. 외국인 단독 투자로 할 것인지, 합영기업인지 합자로 할 것인지 현지를 방문해 토론하기로 하고 몇 가지 기초 서류를 준비하도록 했다.

평양에서 온 세 사람과 공장식당에서 그 동안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수원들에 대한 실습중의 많은 이야기가 갔다. 열두 사람들에 대한 각자의 개성대로 열심히 배우면서 실수도 하고, 때론 게으름도 부리면서 적당히 넘어가기도 했던 추억까지 영원히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여기서 배운 기술 북에서 잘 선보이겠다”

처음에는 남한 기술자에게 배운다는 것이 어쩐지 굴욕감을 느끼는 듯했고, 거부감이 생겼으나 지금은 누가 남인지 누가 북인지 다 잊어버리고 동족의 사랑만 느끼고 있다고 그들은 고백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우리는 통일된 마음으로 영원히 간직하자고 결의까지 하면서 술잔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술잔을 끝내기에 아쉬운 자리였다. 북한 동무들은 술에 취해 호텔로 가고, 서울에서 온 기술자들은 필자와 함께 술을 몇 잔 더했다. 중국 시골 노래방에도 한국노래가 있어 그 곳을 찾아 타향의 외로움을 달랬다.

30일. 연수생들은 사실상 오늘로서 마무리하고 총 정리하는 날 이다. 평양에서 온 세 사람과 함께 12명 전원이 모였다. 그 동안 기술을 직접 교육한 서울 본사공장 직원들과 정주권 이사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기술교육중의 애로사항과 나름대로의 의견과 아쉬웠던 일들, 지난 4주 가까운 시간에 기술적으로 좀더 알고 싶은 것들을 털어놓고 이야기 했다. 한결같이 고맙게 여기고 좋은 기술 잘 배워 조국에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도 기술을 가리키겠다고 했다. 만경대 공장에서 엘칸토의 좋은 구두를 정성껏 만들겠다고 결심도 보였다.

필자는 콧등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필자도 고생했지만 이 사람들도 하루에 10여 시간씩 강행군을 하면서도 불평 없이 열심히 해줬다. 서로가 눈물겹도록 고마움을 진심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끝나고 나니 마음이 허전하다.

처음 올 때와 비교해 몰라보게 달라져

평양에서 출장 온 대표단과 사업진행에 대한 실무협의를 하고 송별회를 간단하게 했다. 이발소와 미장원에도 다녀오고 목욕도 하고 벌써부터 북한에 돌아갈 마음에 들떠 있다. 각자 만든 자기의 구두를 보물처럼 상자에 정성껏 넣어 간직한다.

나더러 평양에는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평양에 오시면 꼭 만나자며 안부를 남긴다. 평양에서 온 한 과장은 식사도 많이 하게 되고 살도 제법 통통하게 붙었다. 이제부터 제대로 식사도 하고 허리도 펴지고 사람모습으로 돼 가려는데 돌아 갈 날이 된 거다. 아쉽다.

다들 얼굴에 윤기가 돌고 배에 기름 끼가 조금은 자르르 한 것 같다. 처음 왔을 때 보다 더 활기가 있고 씩씩해진 모습 들이다. 내가 괜히 신이 나고 자랑스럽다.

이제 평양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그 동안 먹었던 음식을 언제 또다시 먹을 수가 있을까 본인들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 아픈 일이다. 원 없이 잘 먹였는데도 그래도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 아쉽고 미안한 생각이 든다.

10월 1일이다. 중국은 이날부터 5일까지 공장이 논다. 그래서 연수생들도 어제 일정을 마무리 한 것이다. 아침 일찍 산보 가자고 했으나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하기야 그 동안 매일 아침 단 하루도 빠짐없이 자의 반 타의 반 내가 설치니까 따라간 것이지 조금은 지겨웠을 것이다. 김태이는 두 번인가 따라가고 이후에는 아예 포기했다.

냉면이며 과일을 가득 챙겨줘

그는 돌아가서 진로 소주 먹고 싶어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 그는 소주를 참 좋아했다. 아마 매일 2∼3병 꼴은 마셨을 것이다.

냉면을 그렇게도 많이 먹었는데 워낙 많이 보내와서 부족하지는 않았다. 냉면을 전부 챙겨보니 1박스가 120인분인데 6박스나 남았다. 필자는 친정에 다니러온 딸에게 짐 싸 보내는 마음으로 ‘청수냉면’이란 봉투를 전부 베끼고 중국박스에 차곡차곡 120인분씩6박스(720명분)을 만들었다.

들기 좋게 줄로 묶어 줬다. 뭐 더 싸줄 것 없나 하고 찾아보니 과일이 생각나서 사과 바나나 등 몇 박스 준비하고 나니 마음이 흐뭇하다. 그래도 섭섭해서 점심시간에 송별회를 한 번 더 했다. 각자의 의견도 한 번 더 들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의견교환을 또 충분히 했다. 양쪽 다 이번 기술연수는 대 성공이라고 단정 지었다. 사실이다.

필자도 짐을 챙겨보니 제법 된다. 아내 구두며 세탁물 옷가지들이 제법 된다. 식당 아주머니도 고생했다고 예쁜 구두 한 켤레와 화장품도 선물했다. 호텔로 돌아왔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밤 11시 넘었는데 전성근, 오광식, 정주권 3사람이 양주 한 병을 들고 내 방을 두들긴다.

잠 못자고 있는데 반갑다. 내 손을 꼭 잡고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했다. 우리 함께 더 잘 해 보자고, 꼭 성공시키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계속 수고해달라는 부탁도 한다. 역시 술이 있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자정이 훨씬 넘었다.

전성근은 “우리 찬구 사장 선생이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수도 이끌어 나갈 수도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필자도 이 말을 들으니 기분도 좋다. 이 때만큼은 사실이 그렇다고 내 스스로를 인정하고 싶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까운 것 왜 다 토해네나” 웃음바다

10월 2일. 평양 연수생들 귀국하는 날이다. 아침식사는 소고기국을 많이 끓여 달라고 부탁했다. 기름 끼 빼고 살을 많이 넣어 푹 끓이라고. 한 사람 앞에 두 그릇씩 돌아가게 했다. 나는 돌아다니면서 국을 강제로(?) 더 부어주며 든든히 먹으라고 권했다. 북경 행 비행기 타기 전 상해시내 구경을 시키기 위해 6시에 공장을 출발했다.

양복을 쪽 빼 입었는데, 목욕 이발 했겠다 그 동안 잘 먹었겠다, 올 때 보다 훨씬 당당한 모습이다. 북경에서 잠깐 배지를 떼었던 왼쪽 가슴의 ‘수령님 배지’까지 모셨으니 씩씩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청년의 모습이다.

아침을 너무 잘 먹었는지 너무 많이 먹었는지 ‘김춘실 과 김해옥’ 두 여성동무가 차멀미를 해 미역과 소고기를 창 밖으로 쏟았다. 차 안에서는 멀미한 사람 고통은 접어두고 “야! 그 아까운 것 다 내 놓으면 어카나? 욕심껏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니가?” 한바탕 웃고 손뼉을 치며 웃음이 터졌다.

정 이사와 기계담당 정 과장은 서울로 바로 떠나야 할 시간이라 공항에 내려주고, 두 여성동무는 멀미 때문에 더 이상 차를 탈수가 없어 상해 공항 옆 ‘에어 포-트’ 호텔에 방을 얻어 쉬게 했다. 다른 일행들은 상해 시내 관광을 나서는데 말도 안 통하는 환자를 두고 갈 수 없어 필자는 다시 호텔로 갔다.

방문을 두들기니 죽은 듯이 대답이 없다. 나라고 소리쳐도 기척이 없다. 덜컥 겁이 난다. 혹시(?) 저 세상 간 건 아닌가(?) 식은땀이 나고 무서운 생각이 왈칵 난다. 사람이 가려면 우습게 간다. 계속 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뒷모습 가슴 찡해

‘김춘실 김해옥 동무 나 김찬구야요! 들리면 문 열라!’ 한참만에 문을 여는데 다 죽어 가는 모습이다. 호텔 측에 부탁하여 소화제와 따뜻한 물을 먹이고 등을 두들겨 주고 두 여성이 교대로 화장실을 드나들며 내 놓는다. 방안에 쉰 네가 가득하다. 비행기를 탈수 있을지 걱정했다. 간호하느라 진땀을 뺐다.

화려한 ‘상하이’의 발전상을 3시간 동안 관광을 시키고 ‘레인보우 호텔 한국식당’에서 소고기 갈비, 갈비탕, 된장찌개, 파전과 맥주 소주 등으로 만족하게 점심대접을 하고 오후 1시 20분 공항으로 갔다.

눈에 익어서인지 북한 사람들의 옷에는 김일성 휘장이 왼쪽 가슴에 붙어 있어야 짜임새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북경서 수령의 휘장(배지)을 잠시 떼라고 할 때 나를 죽이고 싶었다는 회상도 했다.

짐들이 많다. 구두상자, 냉면상자. 과일상자, 이불 보따리 등 가지가지다. 멀미하는 두 여인에게는 미리 멀미약을 먹이고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돌보면서 북경공항에 도착했다. 북경대사관에서 출발 할 때처럼 대형 버스에 김진수(민경련 북경 대표부 중국어 통역 겸 경리담당 지도원)가 마중 나왔다.

곧 바로 대사관으로 직행하여 전원 인수인계하고 혼자 돌아오려니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를 않는다. 다들 섭섭해서 몇 번을 뒤돌아보면서 묵중한 철문 사이로 손을 흔들고, 그 동안의 정 들었던 마음들을 서로의 가슴에 안고 이산가족처럼 헤어졌다.

쓸쓸한 마음으로 길다란 대사관 철문을 몇 번이고 뒤 도라 본다. 그들이 사라지는 마지막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메여온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