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球상 절대고립 지역이 북한에 있다

▲ 회령 수용소 전경, 미국 디지털 글로브 (2003년 6월)

2002년과 2003년에 걸쳐 미국 <북한인권위원회>가 위성사진 전문 촬영기관 디지털 글로브에 의뢰해 찍은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공위성 사진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이것이 정치범수용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맞는 말이다. 인공위성 사진만으로는 그곳이 정치범수용소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 정치범수용소나 수용소 경비대원 출신 탈북자들이 인공위성 사진에 나타난 지형과 건물의 용도에 대해 설명한 것이 전부다.

그리고 일반 탈북자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라도, 일반 주민들이 그곳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증언을 통해 그곳이 ‘무언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천연 수용소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일반주민들 사이에는 ‘특별독재대상구역’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당국에선 14호 관리소, 15호 관리소 등 ‘00호 관리소’라 부르며 국가보위부에서 담당하고 있다. 겉으로는 ‘조선인민군 ○○○○부대’라는 현판을 걸고 군사시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소라 하면 감옥을 생각하기 쉽다. 거대한 감옥이 존재하고, 감방마다 수인들이 갇혀있으며, 동일한 죄수복을 입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그렇지 않다. ‘특별독재대상구역’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의 일반 사회가 일반적인 사회주의 독재를 실시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특별한’ 독재를 실시하는 곳이다. 외형상 일반 사회와 다를 곳이 없지만 주민들의 생활이 완전히 통제되고 일체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으며 ‘특별히’ 잔혹한 인권탄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탈북자들의 증언과 인공위성 사진에 나타난 모습만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존재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곳에 직접 들어가보기 전에는 어떻게 설명을 해줘도 믿지 못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험실에 직접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2차대전 말 유럽 사람들처럼 말이다.

외부노출과 ‘제2전선’ 형성 우려 때문에 수용소 통폐합

일반적으로 정치범수용소는 깊은 산 속에 있는 마을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마을들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완전독재대상구역으로 설정해 놓고, 그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삼엄한 경비를 선다. 사람이 쉽게 접근할 없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천연(天然) 수용소’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컨대 강철환씨 등 한국에 입국한 10명의 탈북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15호 수용소는 함경남도 요덕군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주위는 병풍산처럼 높고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함북 회령에 위치한 22호 수용소는 반경이 동서로 30㎞, 남북으로 25㎞나 돼 여의도 면적의 25배에 이른다. 수용소 사방이 해발 1000미터의 산들로 병풍처럼 에워 싸고 있어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감시하기에 더 없는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넓은 지역에 정치범수용소의 마을들이 각각 나뉘어져 있다. 북한에서는 연좌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당사자만 끌려가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 일가족까지 수용된다. 그래서 한 마을에서도 독신자구역과 가족세대가 나뉘어져 있다. 또 재일동포들을 따로 모아 한 마을을 만들기도 한다.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전역에 퍼져 있는데 현재 위치가 확인된 곳만도 평안남도 개천(14호), 평양 승호구역(26호, 91년 1월 이동)이 있고, 함경남도에 요덕(15호), 평안북도에 천마(27호, 90년 11월 이동), 함경북도에 온성(12호, 87년 5월 이동), 종성(13호, 90년 12월 이동), 회령(22호), 청진(25호), 경성(11호, 89년 10월 이동), 화성(16호)구역이 있다.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실린 정치범수용소와 교화소 위치

북한 정치범수용소는 원래 10여 곳이 존재하다가 1980년 말~1990년대 초반에 걸쳐 통폐합의 과정을 거쳐 지금은 5개소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폐합 전에 각 수용소마다 수감인원이 5천~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수용소의 총 수감인원은 약 20만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 당국은 평양이나 국경에 인접하여 외부에 존재가 알려질 우려가 있는 수용소를 통폐합하였다. 1987년 5월 온성 12호 수용소에서 정치범들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5000여명의 정치범들이 학살된 사건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치범들이 폭동을 일으켜 ‘제2전선’을 형성할 우려가 있어 국경지역의 온성과 종성 수용소를 회령으로 통합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정치범수용소

명칭

위치

수감유형

비고

14호

평남 개천

가족

국가안전보위부

7국 관리

15호

함남 요덕

본인, 가족

16호

함북 화성

가족

22호

함북 회령

가족

25호

함북 청진

본인

통폐합된 수용소

명칭

위치

해산일시

이유

11호

함북 경성

1989. 10

김일성 별장 건설

12호

함북 온성 (창평)

1987. 5

폭동, 국경인접

13호

함북 온성 (종성)

1990.12

국정인접, 외부노출

26호

평양 승호구역

1991. 1

평양인접

27호

평북 천마

1990. 11

이유불명

살아서는 나올 수 없는 공포의 ‘완전통제구역’

정치범수용소는 크게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혁명화구역’은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 – 대부분 북한 형법에 의거하지 않고 정상적 재판절차도 밟지 않은 죄목으로 –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이 중의 일부는 다시 사회로 나오기도 한다.

요덕수용소의 경우 재일동포가 상당수 있는데 재일동포의 경우 북한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 필요성이 떨어지면 별다른 죄도 없이 끌려오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친척들의 송금액에 따라 사회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권력중심부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도 김정일의 필요에 따라 정치범수용소에 보냈다가 어느 정도 교육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사회로 내보내기도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정치범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은 모두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혁명화구역’에서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가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보위부원들에게 반항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끌려간다. 강철환씨의 증언에 의하면 기독교를 몰래 믿다가 ‘혁명화구역’에 끌려온 교인이 이곳에서도 몰래 기도를 하다가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완전통제구역’은 말 그대로 한번 끌려가면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는 구역을 말한다. 이곳에 끌려간 이들 대부분은 초기에는 북한 건국과정에서 반동으로 분류된 지주, 친일파, 종교인, 한국전쟁 당시 치안대에 가담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과 김정일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숙청된 사람, 북한체제나 김일성, 김정일을 비판하거나 혹은 몰래 외국 사람과 접촉한 유학생이나 직원, 그리고 최근에는 식량난 이후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 중 남한사람과 접촉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다는 점과 억압강도가 ‘혁명화구역’보다 훨씬 심해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조차 ‘완전통제구역’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라고 한다.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중에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가게 되면 도중에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의 차이는 예컨대 수감자들의 보위원에 대한 행동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혁명화구역’에서는 보위원이 지나가면 90도로 인사를 하지만 ‘완전통제구역’에서는 무릎을 끊어야 한다. 14호 관리소의 경우는 뒤로 돌아서서 무릎을 끊어야 한다고 전해진다. 또한 노동강도는 훨씬 강한 반면 식사량은 훨씬 적어 더욱 생존하기 힘들다.

정치범수용소의 관리는 국가보위부 소속 보위원들이 책임지고 정치범수용소의 경비는 국가보위부 소속 경비대가 담당하고 있다. 탈북자 안명철씨는 국가보위부 7국 경비대 소속이다.

보위부원 중에는 간혹 인간적인 사람도 있으나 얼마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만약 수인들을 도와주는 것이 발각될 경우에는 탄광으로 쫓겨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범들을 가혹하게 다룰 수밖에 없고 점점 비인간화된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문가인 오가와 하루히사 일본 동경대 교수는 이를 두고 “수인과 보위원이 다 야만인이 된다”며 개탄한다.

성분불량자 → 김일성 반대자 → 김정일 반대자

정치범수용소는 초기에는 지주와 친일파, 종교인 등을 수용하는 시설로 만들어 졌다가 몇 차례의 변화 과정을 겪게 된다.

우선,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남로당파, 소련파와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한국전쟁 과정의 월남자 가족, 치안대 가담자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확대된다.

다음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말까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중앙당 집중지도사업과 주민재등록사업이 실시되면서 전 주민을 핵심계층, 적대계층, 중간계층으로 분류하고 다시 51개 성분분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중 적대계층을 강제수용소에 구금하게 된다. 그리고 60년대 후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자들 또한 강제수용소로 보내게 된다.

그리고 1972년 정치범수용소의 관리가 사회안정성에서 국가보위부로 이관되면서 전국적으로 정치범수용소가 증설되고 통제 또한 강화된다. 이 시기에 정치범수용소와 수인들이 대거 늘어나면서 폭동과 탈출이 몇 차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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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세습과정에서 이에 반대한 사람들과 그 가족 15,000여명이 대규모로 수감되고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사회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유학생들과 외교관들이 대거 수용된다. 그 외에도 북송 재일동포들과 그 가족들도 1970년대 후반부터 상당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종합해 보면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건국 초기에 성분불량자를 시초로 하여 만들어 졌으나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대규모로 증설되고 유일사상체계의 확립과 김정일의 세습과정, 사회주의 몰락과 식량난 이후 체제유지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편에 계속)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