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식량난 시기 생계형 절도로 공개총살 부지기수였다

이번 유분희 씨 공개처형 죄목은 옥수수 10kg을 훔치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판결문을 낭독하는 검사는 “개인 사리사욕을 위해 어린 소녀를 살해한 함주 편직공장 노동자 유분희를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했다. 유씨는 장마당 환율로 1달러가 조금 넘는 옥수수를 훔치려다 사람을 살해했다. 그는 이를 돈으로 바꿔 음식을 사먹었고 곧이어 체포됐다.

식량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같은 유씨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옥수수 10kg 때문에 살인까지 저질러야 하는 것이 오늘 북한의 현실이다. 90년대 중반 식량난 시기는 옥수수를 훔치다 공개처형 당한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굶주림을 참지 못해 주민들은 농장 밭에 뛰어 들어 옥수수를 훔쳤다. 특히 이 시기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군량미 충당을 위해 군대를 풀어 농장 밭과 탈곡장을 지켰기 때문에 훔치다 걸린 주민들에게 ‘군량미 절도죄’라는 중죄가 같이 씌워졌다.

그래도 식량을 훔치는 행위가 근절되지 않자 사형까지 실시했다. 평안남도 00군 보안서 출신 탈북자 K씨의 말에 의하면 “97년 매해 2천명씩 사형하라는 당국의 지시가 내려와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 식량 절도범도 사형했다”고 증언했다. 200 여개 시, 군에서 매년 10여명 씩 사형한 셈이다.

실제로 기자가 북한에서 직접 목격한 공개처형만도 10여 차례가 넘는다. 그 중 참관하지 않은 공개처형이 더 많은 것으로 기억된다. 2005년에 입국한 탈북자 김영수(가명)씨도 북한에서 공개처형을 수십 번이나 구경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탈북자 이영남(가명)씨도 “98년 겨울 평안북도 영변군 오봉리 한 농장원은 탈곡장 옥수수 100kg을 훔쳤다가 ‘군량미 절도죄’로 몰려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식량 절도범은 사형당한 사람보다 감옥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다. 보안서는 식량 절도범이 입감되면 “밖에 있는 사람도 먹을 게 없는데, 너희들까지 먹을 게 어디 있느냐?”며 걸핏하면 ‘감식처벌’을 주곤 했다. 감옥에서 허약(영양실조)에 걸려 죽을 때까지 방치한 후, 거적에 싸서 어디론가 내다버렸다.

이렇게 죽은 주민들은 ‘군량미 절도죄’로 주민등록 문건에 남아 후대들에게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대다수 ‘빽’이 없이 순진하게 살아왔던 주민들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북한의 공개처형은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입국한 탈북자 최모씨는 “내가 북에서 나오기 전에 증기기관차 페달을 밀수했다는 죄로 평안남도 개천기관차 수리공장 노동자가 사형당했고, 평안북도 선천군 한 농장원이 전기선을 잘라 팔다 총살됐다”고 말했다.

수해까지 겹친 올해는 특별히 식량이 모자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식량 때문에 처형될지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렵다.

김인규 기자(평양출신, 2004년 입국) kik@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