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中펑더화이와 김일성 간의 신경전

6·25전쟁 중에 중국인민지원군은 전쟁에 참전했다고는 하지만 지휘권, 전투 방침, 물자운송체계 및 정전시기, 정전 교섭 등과 같은 다양한 쟁점들을 놓고 북한 인민군과 갈등을 빚었다.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는 중국군에서도 서열 3위 안에 드는 백전백승의 수완가였다. 그는 성격도 솔직 담백하여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마오쩌둥(毛澤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의를 제기하고 직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직한 군인이었다.


이 같은 자질을 갖춘 펑더화이는 김일성을 군인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바보 취급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개의치 않고 김일성을 빈정거리거나 그에게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무렵, 조선인민군은 UN군의 공격 앞에 열세에 몰린 데다 전투력도 날이 갈수록 떨어지면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제39 사단이 미군 제24 사단에 포위된 채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 조선인민군 전차사단이 오발탄을 날려 많은 중국군이 사망한 참극이 발생했다. 전쟁이 열세로 전환되면서 김일성은 전쟁지휘권이나 물자 수송에 해당하는 철도 지배권 등에 관해서도 중국 측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했으며 상당히 조급해했다. 또한 가끔씩 합동작전 지휘를 둘러싸고 김일성은 소련 특사와 합세하여 중국 측과 대립각을 세우고 나섰다.


급기야 제5차 전역에서는 전세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데 김일성은 자국 군대를 보호하기 위해 펑더화이의 지휘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조선인민군을 일시적으로 후퇴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중국군 제64 사단은 퇴로가 차단된 채 포위되는 사태에 직면했다. 중국군 8000여 명이 적의 포로가 됐고 중국 근대사를 통해 최대의 군사피해를 입게 됐다.


이 사실을 접한 펑더화이는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소련 특사가 보는 앞에서 김일성의 따귀를 한 대 후려갈겼다. 결국 이 사건은 스탈린의 중재로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회담하고 중국군에 북중 양군의 지휘권을 양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으나, 당시 중국 측 군부에서 김일성을 대하는 이미지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가를 잘 말해주는 일화다.– 어우양산(歐陽善), ‘중국의 대북조선 기밀파일’ (한울, 2008), pp.5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