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동안 기다린 사람, 2주만에 못만난다니?”

▲전쟁납북자 이봉우씨 부인 유정옥씨와 아들 상일씨가 27일 상봉이 무산되자 망연자실하고 있다.ⓒ데일리NK

“56년 세월의 고통도 살아있는 남편을 만난다는 기쁨에 모든 게 치유되는 듯 했으나, 그 기쁨도 하루아침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사라졌습니다.”

유정옥(76) 씨는 지난 8일 북측으로부터 6.25전쟁당시 북으로 끌려간 남편 이봉우(82) 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28일부터 3일간 금강산에서 열리는 이산가족 특별상봉 행사에서 50여년 만에 남편을 만날 수 있다는 통보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상봉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 20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북측은 이봉우 씨가 동명이인이고 부인의 이름도 유정옥이 아니라는 통지문을 보내온 것.

이에 대해 유 씨와 아들 상일(57) 씨는 통일부에 재확인을 요청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행정착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28일 상봉은 끝내 무산됐다.

유 씨는 “남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칠십 평생을 살아 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며 “아버지(이봉우)와 말 한마디도 못해본 아들이 오히려 나 보다 불쌍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일 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상봉을 2주일 앞두고 북측이 재확인 요청을 보내 온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어 “다른 전쟁 납북자 가족들에게 송구스럽다”면서 “이번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 납북자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는데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

상봉이 무산된 다음날(27일) 유씨 집을 찾아 현재의 심경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북측의 돌변으로 상봉이 무산됐는데 현재의 심경은 어떤가?

상봉이 무산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속초로 떠났을 것이다. 아버님에게 줄 선물을 정성껏 준비했는데 소용없게 됐다. 어머님은 상봉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면서 기다렸는데 어이없게도 2주 만에 무산됐다.

“북한은 최소한의 인권도 없는 국가인가?”

북한은 최소한의 인권도 없는 국가인가? 적십자사로부터 구체적인 안내서를 받고 상봉을 준비하다가 2주 만에 돌변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개탄스러울 뿐 아니라 현재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

-북측이 재확인 요청서가 조작이라고 지적했는데 근거는?

정황상 틀림없이 조작 날조다. 재확인 요청서에는 아버지의 처 이름과 당신형제 5남매 중 한사람의 이름이 동일인이며, 이복동생 리정순도 아버지의 5남매 중 동일인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상식적으로 가족의 이름이 똑같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북측이 돌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3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일씨가 아버지와 상봉이 무산되자 소용없게 된 선물을 살펴보고 있다.ⓒ데일리NK

첫째로 아버지는 이산가족이 아니다. 북한 보위부원들에 의해 납치된 납북자다. 북한은 상봉을 하게 되면 전쟁 납북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또한 2000년 정상회담과 2002년 적십자 회담에서 전쟁납북자를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만약 이번 상봉이 이뤄지면 이 부분까지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북한을 고려했을 것이다.

둘째 아버님이 연로하시니까 북측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상봉을 취소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추측인데 북측으로부터 재확인 요청을 받기 하루 전 19일 모 방송사에서 전쟁 납북자 최초 상봉이라는 내용으로 방송이 나갔다. 이 방송이 나간 이후 북측이 돌변했다. 그 당시 미사일발사위기 문제 등 상당히 정세가 민감했는데,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 같다.

정부, 北에 변변한 항의도 못해

-통일부의 태도는 어떠했나?

통일부는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는데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북한이 재확인 요청을 보내온 이후 통일부는 노력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 했고, 결국 ‘행정착오’라는 어이없는 최종 답변을 했다.

현 정부는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혈육의 상봉이라는 부분에 너무나 소홀하다. 상봉 날짜를 잡아놓고 북측이 돌변했는데 북측에 변변한 항의도 못하고 있다. 이러고도 국민의 대변하는 정부라고 할 수 있나.

또한 정부는 남북화해 무드 조성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납북자라는 표현자체도 못하고 있다. 특히 전쟁 중 납북자를 전후 납북자와 구분 하지 않고 뭉뚱그려 480 여명이라고 이야기 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전쟁 납북자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멀어져 간다.

-정부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통일부의 이런 태도가 10만 여명의 납북자 가족들에게 절망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통일부는 전쟁 납북자 문제에 대해 오래전 일이고 방대하기 때문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부, 납치문제 있어서 일본 본받아야

또한 정부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전쟁 납북자들의 생사확인과 돌아가셨다면 기일이라도 알 수 있도록 북한에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명예회복과 납북자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특별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도 통일부는 차일피일 미루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오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몇 명의 납치자 구출을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일본정부를 본받아야 한다.

-북측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북한은 상봉을 약속해놓고 급작스럽게 취소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을 해야한다. 재확인 요청을 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착오가 있었다면 가족들에게 사과 해야한다.

김정일은 자식된 입장에서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생사확인만이라도 해줬으면 한다. 기본적인 인권을 생각해서라도 인도적 차원의 전쟁납북자 송환이 필요하다는 가족들의 애절한 심정을 알았으면 한다.

-납북자 가족으로서 한마디 한다면?

1만 여명에 이르는 전쟁 납북자 가족들에게 절망을 안겨드려 죄송하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좋은 소식이 있을 때까지 힘을 냈으면 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국내 NGO들과 논의를 통해서 전쟁 납북자 문제에 대해 국내외에 널리 알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