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소련 정치범으로 전락한 北 여성의 이야기

‘외국 정보기관의 요원, 조국을 배신한 자들, 반소련 조직의 참가자, 처벌단 단원 및 기타 추적 대상 범죄자들에 대한 알파벳 순 목록’이라는 제목의 소련 기밀 문서 표지. /사진=이휘성 국민대학교 책임연구원 제공

최근 독일에서 흥미로운 소련 기밀 문서가 공개되었다. 문서의 제목은 ‘외국 정보기관의 요원, 조국을 배신한 자들, 반소련 조직의 참가자, 처벌단 단원 및 기타 추적 대상 범죄자들에 대한 알파벳 순 목록’이다. 1969년 소련 비밀경찰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 출판한 이 책은 표지에 ‘절대 비밀’이라는 마크가 찍혀 있다.

필자는 이 문서를 통해 목록에서 한반도 출신 인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조명길’이라는 여자인데,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워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우선 KGB 자료를 살펴보자.

조명길의 프로필. /사진=이휘성 국민대학교 책임연구원 제공

독자들을 위해 번역한 글은 아래와 같다.

조명길, 이명(異名) 조명자, 1928년생, 출생지 : 조선(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조선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자. 전화 교환원, 접대원, 전동미싱 재봉사, 무용가 자격 있음. 키: 중간, 마른 체형, 수평적인 어깨,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 둥근 얼굴, 낮은 이마, 아치형 눈썹, 작은 코, 직선형 콧등, 코끝이 약간 올라가 있으며, 입술은 얇고 입은 작고, 귀는 작음, 왼쪽 눈의 눈썹 위에 작은 점이 있다.

동거인인 가이토프 바킬 나마토비치는 바슈키르 자치 공화국 알르페예브스키 구 슬락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북조선 원산시에서 살면서 “조선민족사회당”이라는 친파시스트 지하 조직에 가입했으며, 그 조직의 임무를 받아 소련 군대가 위치한 지역에서 정보를 수집 등 간첩 활동을 했다. 1946년에 이로 인해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인 1955년에, 그녀는 소련 시민과 결혼하여 소련에 정착할 것을 요청하며, 풀려난 후에는 타슈켄트의 섬유 공장에서 일하거나 타슈켄트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잔기아타 마을에서 일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석방 후 1955년 12월 17일, 그녀는 동거인인 가이토프 바킬 나마토비치의 거주지 바슈키르 자치 공화국 슬락 마을로 이주하였다. 가이토프는 원래 수용소에서 복무했던 경비원 저격수였다. 1956년 2월, 그녀는 바슈키르 자치 공화국을 떠나 잠적했다. 그녀의 1946년 사진이 있다. 이는 국가보안위원회 바슈키르 자치 공화국청이 보관하고 있는 수사 기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전에 1967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내각 산하 국가보안위원회의 수배 지침서 제29호에 따라 수배된 바 있다.)

위의 글을 통해 우리는 조명길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첫째, 조명길은 1928년생으로, 1945년에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했을 당시 17세 정도였다. 그녀의 일본식 이름인 ‘조명자’는 1939~40년경 창씨개명 시기에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둘째, 조명길은 ‘민족사회당’이라는 우파 정당에 입당했으나, 이 정당의 역사와 그녀의 연결은 비극적이었다. 이 당은 1945년 8월 31일에 설립되었으며, 원래 이름은 ‘민족당’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아마도 소련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으려는 계기로 ‘민족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 결정은 커다란 실수였다. 이는 히틀러 독일의 ‘독일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과 유사한 이름을 가진 탓에, 소련군은 이를 ‘친파시스트’ 조직으로 간주했다. 더불어, 탈북한 북한 간부 박병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민족사회당은 1945년 9월 현준혁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이해가 있었고, 이는 ‘대동단’과 유사한 조직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 자료를 확인해보니 민족사회당과 대동단은 다른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46년부터 소련군은 민족사회당의 당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조명길 역시 이 캠페인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그녀의 주요 잘못은 소련군의 정치적 입장에서 불편했던 정당에 입당한 것뿐이었다.

결국 조명길의 이야기는 단순히 이름이나 당의 선택으로 인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일종의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비극적이다.

조명길의 이야기는 매우 비극적이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20세도 되지 않았던 나이에 소련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KGB의 파일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예상치 못한 사랑을 찾았다. 스탈린 시대에 수용소 내 경비원과 수감자 사이의 로맨스가 거의 없었다. 특히, 조명길이 소련 출신이 아니었고, 수용소에 오기 전까지 러시아어를 몰랐던 점을 고려하면 그녀와 바킬 가이토프 경비원 사이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고 드문 사건으로 보인다.

조명길과 바킬 가이토프 경비원은 결국 커플이 되었고, 조명길은 타슈켄트에서 애인의 고향으로 탈출하다가 두 사람은 함께 사라졌다. 이들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명길도 바킬 가이토프도 함께할 미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위험한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명길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956년 2월로, 같은 달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고, 몇 달 후 소련은 대규모 정치범 석방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9년 기준으로 조명길은 여전히 수배 대상이었으며, 이는 그녀가 무죄를 인정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결국 민족사회당이라는 이름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 이름은 그녀에게 영원히 저주로 남았다.

조명길과 바킬 가이토프의 이야기는 더욱 미스터리와 비극이 얽힌 복잡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러시아 인터넷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이 거의 없지만, 필자는 바킬 가이토프의 친족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탁월한 노동자 메달 수여받은 노력자의 목록’이라는 참고서에서 ‘가이토프 아스갓 나마토비치, 1930년생, 슬락 마을 집단농장 노동자’라는 항목을 찾았다. 이름은 다르지만, 성과 부칭, 그리고 거주 마을까지 바킬 가이토프와 일치하는 이 사람은 그의 형제로 보인다.

또한, 가족 기록 사이트인 familio.org에서 아스갓 가이토프(1930~2021)의 가족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조명길이나 그녀의 배우자인 바킬 가이토프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이로 보아, 조명길과 바킬 가이토프는 그의 가족과 어떤 형태로든 소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의 스토리는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으며, KGB는 스토리의 주인공들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명길의 운명은 그야말로 잔혹한 장난처럼 펼쳐졌다. 그녀는 자유와 고향을 잃었지만, 이국 땅에서 사랑을 찾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비밀 경찰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탈출한 것이다. 조명길의 이야기는 단순히 고난과 역경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한 회복력, 인내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이며, 그녀가 겪은 비극은 결국 사람의 강인함과 인간성을 강조하는 교훈이 된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