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2010년 북한의 신년공동사설도, 이명박 대통령의 신년국정연설도 모두 발표되었다.
김정일 정권은 외부적으로는 제2차 핵실험이 야기한 국제적 제재조치를 각개격파하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화폐개혁으로 인한 물자부족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에 유화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 남북 간의 상설대표부를 설치하고 이명박-김정일 회담의 가능성을 한국정부가 부인하지 않고 있다는 정도가 언급할 만하다.
물론 남북 정권의 대북·대남정책이나 고위급 내지는 최고위급 책임자들의 만남이 남북관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다.
예를 들어 2000년 김대중·김정일의 회담에서 합의된 6·15선언과, 여기에 포함된 통일방안은 지금까지도 남북관계와 통일방안을 두고 벌어지는 한국 내의 논쟁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국 내의 이른바 이념논쟁의 핵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직결된 6·15선언의 통일관련 조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남북 당국자들의 이러한 움직임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조만간 밀어닥칠 한반도에서의 대변화의 추세를 바꿀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이 성사되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남북통일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남북 햇볕버블’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당시의 낙관론은 그 객관적 토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반드시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객관적 토대이지 주관적인 버블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김정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퇴임 후에 초대한다고 해놓고도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상황을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선전선동과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낮과 밤을 지새우는 김정일은 흥행가치가 없는 쇼는 즉각 막을 내리고, 대박이 예상된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을 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 점은 김정일이 두 명의 미국 여기자를 인질삼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꼬아낸 것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명백해진다.
II.
수년간 ‘북한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남북 간의 여러 상황을 관찰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일은, 남북 당국자들의 시류편승적인 대북·대남정책 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북한의 내부 상황과 구조적 모순을 추적하여 이 내적 모순이 언젠가는 도달할 임계상황에 대비하는 일이다.
다시 한번 과거처럼 ‘바보 같은 남북회담’을 하든, 아니면 남북한 국민의 한을 풀어주는 ‘똑똑한 회담’을 하든 북한의 이 구조적 모순의 해결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 북한의 내적 모순은 김정일의 힘으로도 바꿀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여기저기서 돈과 물자를 뜯어다 대를 물려 현상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사실 선군정치의 핵심이었다.
1948년 자칭 건국 이래 단 한순간도 자립해 본 적이 없는 김일성·김정일 정권이 ‘주체’를 논한다는 것은 배부르고 따뜻한 지배층이 ‘자력갱생’을 빌미로 북한인민을 가두어 놓은 채 계속 착취하기 위함이고, 이것이 북한의 발전을 저해하는 위선적 모순이다. 다음으로, 사실상 북한에 전혀 필요 없는 핵을 개발하여 크게 한 건 올려 먹고 살겠다는 생각, 그리고 핵을 방패로 자식을 새로운 수령으로 만들겠다는 오랜 망상으로 인해 경제 재건에 필요한 시간을 수십년간 낭비하는 자기 맹신적 모순이다.
북한경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제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멈춰 선 북한의 공장에서 된장, 고추장, 맛내기, 기름, 쌀, 감자, 무, 구두, 장화, 우산 등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면 물론 북한의 화폐개혁은 성공할 것이다(열거한 생필품은 이번 북한의 신년 포스터에 등장하는 것들이다).
여기서 솔직히 필자는 독자들에게 분명히 사과할 일이 있다. 그것은 김정일에게 강성대국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으리라는 장담이었다. 그러나 화폐개혁 후 북한의 모습을 보니, 북한은 이미 최고 강성기에 올라섰다! 월급을 100배 올리고 무상 몰수한 생필품을 국영상점에서 싼 값에 공급하니 이것이 ‘강성대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 강성대국의 미래는, 아궁이에 신문지를 꾸겨 넣어 잠시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처럼, 전혀 없다. 이제 “인민은 미래보다 순간에 산다!”라는 구호가 김정일에게 필요한 순간이 왔다.
III.
남북 양쪽에서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큰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김정일에게 ‘미 제국주의’와 그 ‘괴뢰 정권’은 사실 적이 아니라 빨리 빨대를 꼽아 보급투쟁의 활로를 열어야 할 큰 창고이다. 김정일의 ‘주적’은 바로 북한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장마당과 시장을 운영하고 시장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하는 북한인민들이며, 지난번 화폐개혁은 바로 북한인민을 적으로 간주한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구조적 변화가 남북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로 무섭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필자가 기꺼이 ‘민간 통일부’, ‘민간 정보부’의 등장이라고 부르고 싶은 북한관련 시민단체들의 맹활약이다.
우선 남북의 화해·협력을 시작으로 궁극적인 통일에 이른다는 단계적 통일론은, 끝없이 새 출발을 다짐하는 말잔치에 그칠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그래왔지만, 공식적인 통일론으로 남아 있다. 단계적 통일론의 핵심문제는 그것이 분단관리정책이라는 점이다. 즉 분단관리가 필요한 시점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지만, 통일대비가 현실적 의미를 지닌 지금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단계적 통일론의 끝이 북한의 체제변화이고 통일이지만, 실은 북한의 체제변화를 전제로 해야만 통일이 현실적으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부는 아직도 이와 같은 공식적인 통일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민간 시민단체들이 ‘통일론의 사고전환’을 들고 나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앞으로도 통일정책과 통일이념에 관한 한 정부의 통일부보다 현실적으로 운신이 더 자유로운 ‘민간 통일부’의 역할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햇볕정책의 미몽과 종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야당이 북한의 체제변환을 전제로 하는 통일론을 극구 반대하리라는 점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실적 통일론에 대한 공백이 발생한다. 또한 앞으로 통일론의 확정은 국민의 의지와 동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기존의 형해화된 통일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통일부보다는 현실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시민단체가 통일론에서 사고의 대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다른 한편, 작년은 대북정보수집과 대북정보유입의 분야에서도 시민단체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것은 이제 2만 명의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동시에 북한의 친지들과 직접 통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과 북한 양쪽 상황을 잘 아는, 그리고 친지들의 안위와 북한해방이 결코 다른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통일운동의 귀중한 활동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0년 햇볕정책 하에서 남북한의 자칭 ‘통일일꾼’이라는 사람들의 활동은 사실상 그 절반은 통일전선부 요원에 불과한 대남 공작요원들과의 만남을 마치 민간통일사업으로 포장하여, 그 관변성, 그 비자주성, 그리고 북한의 실상을 봐도 못보는 현실착란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들이 만나서 하는 말의 99.99%가 “우리민족끼리”라는 한 단어의 반복과 변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이들이 얼마나 이념 고착의 자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가 분명해진다.
반면에 북한의 극단적 폐쇄성은 북한 내부에서 유출되는 정보에 대한 가치를 높여, 국내외의 언론사에서 그 대가를 지불할 정도에 이르렀다. 바꿔 말해 정보기관이 아니라 언론기관이 정보수집에 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져도 언론시장에서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즉 북한정보를 퍼내는 펌프가 순전히 민간분야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그것도 경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필자가 볼 때 계속 증가하는 탈북자는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오는 것이 아니라 북한 내부와의 관계를 같이 갖고 오며, 그것은 갖고 오는 정보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국의 공식적인 정보기관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으리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또한 북한에 외부의 정보를 유입하는 단체도 더 이상 정보기관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있음은 작년의 대북전단살포와 관련된 논란에서도 분명해졌다. 라디오, 전단뿐 아니라 대량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CD(알판) 및 기타 전자매체, 나아가 TV방송이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놀랄 일은 전혀 없다. 이들 시민단체들은 국가가 ‘고압가스안전관리법’과 같은 법 적용을 하더라도 충분히 생존력과 돌파력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시민단체의 북한정보수집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입수된 정보의 신빙성 확인이 가장 큰 문제이며, 여기에는 민간 부문에서의 상호협조를 통해 정보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개발과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정보융합평가원’을 민간 차원에서 설립하는 것도 그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통일론과 통일정책을 통일부가 독점한다는 것이 전혀 무의미 하듯이, 북한정보수집과 북한정보유입을 정보기관에서 독점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이제는 ‘민간 통일부’와 ‘민간 정보부’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여 관-민 간에 공조가 필요하다.
2010년은 민간차원에서 통일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심화시키는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인프라에서도 우선 통일론의 사고전환과 ‘북한정보융합평가’와 유입 분야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하는 한 해가 된다면, 북한관련 시민단체들은 북한의 급변사태든 아니면 장기적인 정체기간이든 시대정신과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민간 통일부’, ‘민간 정보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