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대선, 지식인이여 낙관을 접어라

▲ 독일통일 당시 환호하는 동서독 시민들<사진:pohl-projekt.de>

1989년 7월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던 나는 잠시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느날 MBC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는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여 김일성과 통일 3원칙에 합의하는 등 남북한 간의 즉각적인 통일주장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남한과 북한이 즉각 통일되면 막대한 통일비용으로 남북한 모두 경제적으로 주저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의 경우 통일 즉시 부양가족이 2배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대학생들에게 하면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NL, PD와 같은 학생운동권의 흐름을 듣게 되었다. 그때는 친구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나에게는 너무 낯설고 이해되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른바 ‘반통일 세력’은 재벌 등 한국사회의 ‘매판기득권세력’이라는 것인데, 나는 바로 재벌들이 남북한의 통일에서 가장 이득을 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통일 후에 북한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노동력과 땅 이외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치인도 예상 못한 15년 전 독일통일

1989년 11월 9일 새벽 3시쯤, 독일 뮌헨근처의 지붕밑 방에서 학위논문을 쓰고 있던 나는 라디오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접했다.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는 현장을 전하기보다는 그 자신이 ‘현장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날부터 동독국민은 마음대로 서독으로 여행할 수 있다고 동독당국은 발표했다. 유학생에 불과했지만 내가 독일 역사, 아니 세계사의 격렬한 변화의 순간을 목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것은 매우 야릇한 기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얼마 전부터 동독국민들은 서독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제방의 작은 균열이 결국 제방을 붕괴시키듯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동독국민의 탈출행렬은 급격해졌다.

넘어온 동독국민들의 호주머니에 근검절약이 몸에 밴 서독시민들이 100마르크짜리 지폐를 찔러주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 바나나 구경을 거의 해보지 못한 동베를린의 시민들에게 서독의 어떤 바나나 수입업자는 몇 개의 컨테이너에 바나나를 가득 실어 광장에 풀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1990년 10월 3일,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독일은 통일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어도 통일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당시 독일국민과 정치가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냉전의 접경지역에는 나토와 바르샤바 동맹이 대치하고 있었고, 유럽의 전통적 강국 대부분이 독일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모두들 빠르면 5년, ‘아마도 10년 후’를 이야기했고 독일의 사민당이나 녹색당은 통일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동서독의 화폐통합 이후 대세가 어디로 흐르는지는 분명해졌다. 이처럼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됐던 독일통일이 급격히 이루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동독국민의 열망 때문이었다. 결국 동독의회는 결의를 통해 스스로 국가를 해산했지만, 한국에는 마치 서독이 동독을 의도적으로 흡수한 것처럼 알려졌다.

‘3단계 통일론’에 회의

독일통일 후 남북한의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즉 남북한이 서로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의 자생력을 키운 후, 사회 전반의 이질성을 점차 극복해가고,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치적 통일체에 이른다는, 이른바 ‘3단계 통일론’은 독일통일의 경우 책상물림들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해일과 같은 것이었다. 독일의 통일과 함께 동구권 전체가, 그리고 냉전체제의 한 극이었던 소련도 붕괴했다. 시민 5명중 한 명은 정보원이었다는, 그리고 거의 모든 전화가 도청되었다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도 부인과 함께 도주 중 붙잡혀 그 자리에서 처형되는 것을 TV로 지켜보았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나는 유럽의 공산주의 운동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귀국했다.

한국 좌파의 돌연한 변화

1993년 5월 귀국하던 해 한반도는 1차 북핵 위기로 떠들썩했다. 카터의 중재와 중국의 개입으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은 다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으나, 1994년 김영삼-김일성의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김일성이 사라진 북한은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다.

김일성 사망 후 나는 북한정권이 스스로 붕괴되어 남북한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순리하고 생각했다. 통독 과정에서 목도한 것이지만, 만일 양쪽이 비슷한 삶의 조건이라면 어느 한쪽이 권력을 포기할 이유가 ‘절대’ 없을 뿐더러, 남북한을 동시에 늪에 가라앉힐 것이라는 통일비용도 독일의 경우와 한국의 경우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독일의 경우는 실업자가 된 구동독 국민을 먹여 살리는 실업수당, 주거수당, 의료보험비 등 사회보장비용이 통일 후 독일경제의 밑 빠진 독이 되었지만, 한국의 경우 이에 상응하는 의무적 사회보장제도가 없고 그만큼 저렴한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일 후 체제선택의 문제에는 다른 답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불과 몇 년 전에 “당장 남북통일을 하자”던 통일주의자들은 일제히 “당장 통일은 반대”로 돌아섰다. 한국의 ‘기득권 부르주아 세력’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던 이들이 별안간 주판알을 튕기는 현실주의자로 돌변해 “감당할 수 없는 통일비용”을 외우고 다니기 시작했고 통일비용 문제는 국민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이때쯤부터 나는 한국의 ‘진보세력’ 혹은 ‘좌파’라고 불리는 이들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회주의권 붕괴후 ‘진보세력’이 표변한 것은 아마도 해방 후 당시 좌파가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변한 사건과 비교할 만할 것이다.

순진한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과 김정일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연합제)’를 통일론으로 하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3단계 통일론을 이어받은 노무현은 2002년 대통령 후보시절 “통일 이후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야 한다는 것은 소모적인 체제논쟁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5년 9월, 실은 그 이전부터, 동국대 교수 강정구는 김대중이 2001년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한 “한국전쟁은 실패한 통일전쟁”이란 발언을 인용하면서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자 동시에 정당한 전쟁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들의 발언은 모두 한 점을 중심으로 맴돌고 있다. 실은 1980년대 말의 ‘당장 통일주의’와 1990년대 초반 이후의 ‘통일비용 과다론’, 그리고 2000년대 김대중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노무현의 ‘자유민주주의 통일 회피론’, 그리고 강정구의 ‘통일전쟁론’에 이르는 줄거리의 핵은 ‘북한체제의 유지’에서부터 ‘북한체제에 의한 통일’ 사이의 변주곡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결론은 마치 삼각형의 세 중선(重線)이 한 점에서 만나듯 논리적이다. 나는 1989년 MBC 친구와의 대화 이후, 한국좌파에게서 이 점을 오해했다. 설마 북한정권과 같은 ‘봉건세습 파시스트체제’를 옹호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어디 있을까라는 생각, 순진하다기 보다는 어리석었다. 한국좌파의 통일론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의거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들에게 헌법정신이란 아무런 문제조차 아닌 것, 굳이 말하자면 이른바 ‘냉전체제 수구세력’의 입 냄새가 풍기는 하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2007년 ‘남북공정’의 첫 삽질은?

실은 지난 20년간의 한국좌파의 행태에 대한 조감을 하지 않더라도 한국좌파는 이들의 통일론의 핵심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노무현은 2005년 4월 독일을 방문하면서 독일의 지식인, 정치가들의 북한정권 붕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북한 붕괴를 원치 않고 붕괴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 그는 “(독일의)저명한 학자, 정치인들로부터 갑자기 통일되는 사태에 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놀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움’이란 당연한 것에 대한 회의를 누가 제기할 때 겪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놀라움이란 노무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믿는 이들에게 한국좌파의 통일론은 그 역시 놀라움을, 정확히는 분노와 좌절을 가져온다. 좌우 사이에 놓여 있는 이 놀라움의 강은 ‘(당연하지 않은) 당연들의 충돌’이라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으로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체성, 한국전쟁의 기원과 책임, 한국의 근대화 과정, 그리고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현 정권의 친북정책, 그리고 미래의 통일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사 논쟁이 그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해석을 ‘저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저 사실에 대한 해석은 긴 원호를 그려 다시 이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 귀착되는 좌파의 논리는 강강수월래와 같이 큰 원무를 그리며 손발을 맞추고 있다.

한국현대사를 지극히 ‘투명하게’ 만드는 이 자기최면의 논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전제1) 정당화될 수 없는 과거 친일․반공세력의 집권과 권력남용, 인권유린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제2) 이 ‘보수우파’의 적(敵)은 한국 내에서는 민주화세력, 진보세력, 좌파세력임과 동시에 휴전선 너머로는 북한정권이다. 결론) 따라서 ‘적의 적이 서로 친구’라면 한국의 보수우파는 이 두 친구들의 공동의 적, 요즈음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민족공조의 적’이다.

물론 이 기이한 ‘사이비 삼단논법’의 주체는 남북의 현 권력자들이며, 그런 점에서 노무현의 과거사 도면은 앞으로 곧 발주될 공사인 한국미래사의 설계도이기도 하다. 2007년 대선은 이 남북공정의 첫 삽질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 2005년 가을’의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봉건세습 파시즘’과 한국좌파의 ‘잘못된 만남’

나는 논리학과 언어철학을 바탕으로 동서비교철학을 공부했다. 나의 전공 어디에도 현실정치는 없다. 그러나 ‘한국 2005년 가을’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소시민적 지식인의 낙관을 접게 만들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의 급격한 변화 가능성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도덕적 기반 자체가 붕괴되고 있으며, 그 원인은 김정일의 ‘봉건세습 파시즘’과 한국좌파의 ‘잘못된 만남’에 있다.

데일리NK에 기고할 나의 칼럼의 내용은 이 잘못된 만남과 그 예상되는 필연적 결과를 가능하면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데에 있다.

궤변과 정당한 주장이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당연들의 충돌’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견디기가 정말 힘들게 되었다.

이런 개인적 이유에서 출발한 나의 청(請)을 흔쾌히 받아준 데일리NK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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