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당 정동영 대통령후보가 이른바 ‘가치논쟁’이라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들고 정책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하였다.
즉 경제정책에서 ‘성장’과 ‘분배’, 교육정책에서 ‘경쟁’과 ‘평등’과 같이 구체적 정책 실현으로부터 기대되는 ‘가치들’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자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이러한 논쟁은 민주주의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치들은 이념과 정강을 중심으로 모인 무리, 즉 당(黨)의 존재의미이며,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절차인 선거에서 반대급부로 내놓아야 하는 필수 상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장’이나 ‘분배’, ‘경쟁’이나 ‘평등’이 서로 대치적인 가치들인지 아니면 거시적으로 볼 때 둘 다 필요한 가치들인지에 대해서는 더 따질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들은 결코 그 자체로 부정될 필요도, 부정될 수도 없으며 아마도 그때그때의 시대상황과 사회의 필요에 따라 국민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그 우선순위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다른 한편, ‘가치논쟁’이라 함은 당연히 논쟁적 측면을 갖고 있으며, 논쟁이라 함은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법원에서 유죄·무죄를 가릴 때, 증거와 법 조항들이 전제들을 구성하고 그로부터 논리적․경험적 법칙에 따라 판사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유죄·무죄 여부가 되는 것이다. 이때 법원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즉 증거와 법 조항으로 구성된 판결의 전제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와, 전제들은 인정하지만 그것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 즉 논리적 추론과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모든 논쟁은 앞의 법원 판결의 경우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만일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할 경우 논쟁은 이른바 “평행선을 달리게 되며” 이들은 서로 대화를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주장만을 쏟아 붓는 독백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논쟁 혹은 대화를 할 때 당사자 모두가 인정하는 공통의 기반이 필요함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처럼 논쟁에서 공통의 기반이 되는 것은 한 사회의 도덕, 법률, 상식 그리고 전문영역에서 전문가들이 대부분 인정하는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공통의 기반을 때로는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악과의 화해’의 다른 말이 “우리민족끼리”
정동영후보는 그의 가치논쟁의 영역에 아마도 남북관계도 포함시키고 싶어 하는 듯하다.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대결’과 ‘화해’라는 슬로건을 동원해 보수는 남북대결을, 진보는 남북화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고, 상식적으로 대결보다는 화해가 더 추구할 만한 가치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가치논쟁’ 혹은 ‘가치’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선’과 ‘악’ 혹은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개념이 전제되어 있고, ‘악’ 혹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일어났을 경우에 한 사회가 대처하는 방식도 상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인가라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 ‘도덕’ ‘가치’ 등과 같은 개념이 도대체 공허한 말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많게는 300만을 굶어 죽이고 수십만 명을 절멸수용소에서 죽게 한 자, 그리고 지금도 절멸수용소로 체제를 유지시키는 자’에 대한 판단은 보수와 진보, 혹은 어떤 이념적 정당이든 동일해야 한다. 그것은 하루 빨리 종식되어야 할 거대한 악인 것이며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혹은 변명될 수 없다.
이러한 근본적 가치 판단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가치논쟁’도 의미 있게 진행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동영후보는 김정일 정권에 대하여 전혀 다른 가치판단을 하고 있으며, 그는 김정일 정권을 마치 평범하고 친숙한 이웃, 혹은 참다운 정치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노무현대통령이 김정일의 만수무강을 빌며, 수령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수십조의 지원을 하자는 맥락과 같은 것이다.
간단히 말해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함께 ‘거악과의 화해’를 당당하게 내세우는 정동영후보의 언어는 도덕과 가치판단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동물의 언어 혹은 동물과 비견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물도 이러한 거악을 옹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으로 발생할 경우 우리는 사회심리학적으로 “집단광기”라고 부른다. 정확하게 한국의 친북좌파의 행태는 “집단광기”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2007년 가을 한국에서 친북좌파의 집단광기는 자체적 동력을 갖고 계속 재생산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그것은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예술과 학문에서 ‘거악과의 화해’를 “우리민족끼리”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자신과 타인을 ‘종교적 열정’으로 세뇌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을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인 취향을 지닌 직선적 인간”으로 묘사한 자가 매년 이때쯤 발표되는 세계적 문학상을 기다리고 있고, 남북 권력자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자가 신문과 방송에 철학을 빙자해 유아적 치기를 부리고 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력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자가 현재진행형 남북통일을 말하며 진보를 농하고 있다.
‘최선’ ‘차선’을 뽑는 게 아니라 ‘광기’에 대한 심판
권력과 지식인, 지식인과 권력 사이의 재생산 구조에서 친북좌파의 집단광기가 공식적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 논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음으로 양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때로는 그 논의의 정교성으로 이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쉽지 않음은 마치 의처증이나 과대망상증을 논리적으로 논파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과 흡사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들 집단광기의 특징은 체계화된 망상증과 마찬가지로 그 바닥에 있는 전제가 사실왜곡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저 거악을 부정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혹은 없는 것처럼 치부하지 않고는 이들의 광기의 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령체제 자체가 갖는 취약점, 즉 김정일의 자연적 혹은 인위적 종말과 함께 거악을 뒤집어 세워놓은 친북좌파의 집단광기, 광기의 체계도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번 12월 대통령선거는 권력과 지식인, 그리고 지식인과 권력 사이에 이미 틀을 잡은 광기의 재생산체제를 심판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는 최선 혹은 차선의 선택이 아니라 광기의 심판, 혹은 그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