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시각에서 본 북한 여성의 섹슈얼리티

북한 사람들의 성(性) 의식은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다. 북한 사회가 폐쇄적이고 지엽적인데 비해 성문화는 오히려 그 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원인은 이렇게 찾아 볼 수 있다. 북한이 식량난에 접어들면서 한 끼 밥을 위해 여성들이 자신의 성을 제공할 정도로 사회의 물질적 기반이 약해진데 있다고, 현재 중하류층의 적지 않은 여성들은 10여 년 넘게 지속되어 오는 만성적 생활난의 후과로 성에 대한 보수주의적 통념과는 인연이 먼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러면 생활난 이전 북한 지식인 계층 속에 만연되어오던 개방적 성 의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 독재 체제의 억압으로 인한 카타르시스의 출구로 짚어 볼 수 있다. 북한에 왜곡된 성문화가 일찍부터 존재해 온데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개방적인 성생활 관습 – 김일성으로부터 그 시발이 된 – 이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다. 최고 지도자를 거론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북한 지도자가 지독한 난봉꾼이라는 사실은 북한에서 의식 있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통하는 불문율이다. 아무리 사건 관계자들에게 서약서를 쓰게 하고 저택이며 중앙당 울타리를 높게 올려치지만 그의 행실에 대한 소식은 바람에 돛단 듯 기가 막히게 새어나온다. 그의 첫 번째 처는 누구의 처였고, 고영희는 어떤 여자이고, 예술영화촬영소 여배우 누구는 지도자와 어떤 드라마틱한 관계이고, 또 여가수 누구는 지도자의 성적 욕구에 순응하지 않아 ‘그 분’으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고…. 지도자의 이런 행동은 단순히 그 한사람에 한한 소문으로 그치지 않는다. 북한 사회는 철저하게 최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형성되고 결정되는 사회이다. 문화적 분위기나 가치관, 패션, 성 의식……. 최고 지도자의 절제 없는 행동은 당, 사로청 간부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난봉 풍(風)을 전염시켰고 한창 젊은 남성일꾼들이 색을 즐기는 것을 남성의 미덕쯤으로 간주할 정도에 이르게 하였다. ‘호걸호색(豪傑好色)’이라는 용어를 북한 남성들은 즐겨 쓰는데 지도자처럼 술 잘 마시고 여자 좋아하는 것을 남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징표쯤으로 그들은 꺼림 없이 발화하고 행위화 한다.

성 문제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성폭력, 성 희롱문제이다.
북한에서 성폭력이나 성희롱은 운명의 도약을 원하는 여성들 거의가 예외 없이 통과해야 하는 블랙홀이다. 여성과 남성에게 있어서 성폭력이나 성희롱은 서로의 이해관계 도모를 위한 무형의 특종교환 품이다. 즉 노동당 입당, 좋은 직업에로의 승격과 같은 조건들을 놓고 비권력 여성과 권력 남성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인 섹스를 강요당한 여성은 중앙당에 신소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이런 제기를 당한 당 일꾼은 동격조동(같은 직급으로의 이동)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소자 여성은 사회적 터부의 대상이 되므로 이제는 신소를 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북한에서 성희롱이나 성폭력은 언어화 되어있지 않고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지도도 대단히 취약한 편이다. 따라서 성에 대해 일정한 의식이 있는 여성들조차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일종의 도약 발판으로 삼을 뿐 반항을 하거나 법적 소송을 걸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법이 부재한 것과 밀접한 연 관이 있다.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온 북한 여성의 남아선호사상과 혼인 대상

북한에서도 한때 남아 선호 사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결혼한 여자는 첫 자식으로서 아들을 못 낳으면 발언권이 안 섰다. 아들도 첫 번에 낳아야지 두 번 째나 세 번째면 그 며느리의 위치가 금방 떨어졌다. 따라서 아들을 낳으려는 결혼 여성들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기부터 특히 출가 여성들 속에서 절대적 남아 선호 사상에 대한 자연 발생적 저항 의식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금값인 아들을 처음부터 낳아 주는 것보다는 조금은 구박을 받더라도 첫 번째나 두 번째까지 딸을 낳고 이른 바 시어머니의 ‘애’를 단단히 먹이며 몸값을 부쩍 올린 후 아들을 낳아 주는 것이 자기와 아들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았다. 한입 두입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한 이 ‘지론’은 하나의 시대적 조류로까지 확산되면서 대부분 기혼 여성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들은 저마다 이런 대접받는 ‘자식 운’을 지니길 고대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결혼 여성들의 ‘자식 운’에 대한 사고가 또 한 번 탈바꿈하였다. 이제는 ‘대접’의 차원을 지나 아예 아들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북한 경제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자식을 한 명만 요구하는 가정이 부쩍 늘었는데 그런 경우 첫 자식이 딸이어도 무방했다. 오히려 아들만 낳은 여성은 의지할 데 없는 ‘국제 고아’라고 비아냥 받았다. 아들은 성장해서도 큰 부담거리였다. 딸은 키워 시집만 달랑 보내 놓으면 그만이지만, 아들 낳은 부모는 그들이 성장하면 주택이라는 아뜩한 거주지 난관에 예외 없이 봉착해야 했다. 또 결정적인 식량난에 직면한 북한에 있어서 성장한 아들 부양 문제는 딸보다 몇 십 배 심각한 이슈로 떠올랐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칼로리 섭취 양이 엄청난데다 대부분 아들들은 그 나이 또래 딸들보다 생존 방식에 미숙했다. 준엄한 현실에 직면한 북한 여성들은 어떤 위계질서나 전통보다도 인간의 평안이 삶의 근본 초석이라는 지혜를 생활현장을 통하여 배워 낸 것이었다.

아들 선호도가 줄어든 또 한 가지 이유는 북한에서 남성들을 거쳐 분배되는 부의 양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데 있다. 북한은 아들이든 딸이든 사회적으로 획득하는 부의 차이가 별반 없다(이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배분되는 부의 양이 절대적으로 적은 데 원인이 있지 남녀평등의 원리에 의한 양성동등 분배차원은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남근 중심 사회라 해도 북한에서의 남아 선호 사상은 자연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다.

다음으로, 북한 여성들에게 선호되는 혼인대상을 보면 1970년대까지는 조선노동당원이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선호대상이 제대군인으로 변하였다. 군대에 나가 고생하며 “사람 되었다.”는 것이 기본 맹점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제대군인이 조선노동당원보다 조금은 더 현실성을 띤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당시 누가 결혼했을 때 “그 애 남편이 뭘 한 대?” “제대군인 이래.”하면 그 답은 끝이었다. 다른 것은 더 묻지 않아도 될 만큼의 안정적 징표가 그 답 속에 들어 있었다.

8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처녀들의 결혼관이 또 변했다. 혼인대상을 제대군인에서 과학자 내지 기술자, 즉 인생에 쓸모 있는 기술의 소유자, 아니 정확히 말해 ‘밥벌이 기술’의 소유여부가 성공적 남편감의 기준으로 자리 매김 된 것이었다. 부가조건으로 노동당 입당여부도 첨부되었다. 사람들의 사고가 보다 현실적인 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당시 여성들 속에 “여자는 시집 잘 가면 황후요, 잘 못 가면 거지 된다.”는 말이 유행되었는데 이것은 ‘성공적인 결혼’ 신화가 그 시기 여성들 속에 다분히 작동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도시 처녀들 속에 ‘군관(軍官)총각’을 남편감으로 택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풍토가 발생하였다. 이런 사고방식은 엷은 먹물 깨나 머리에 배인 처녀라면 누구에게든 통하는 불문율이었다. 왜 군관총각 거세콤플렉스가 당시 처녀들 속에 만연했을 가? 그 첫째 이유는 군관 총각들의 무학(無學)이었고(왜 그런지 특히 평양처녀들 속에 군관총각은 무식하다는 표상이 특별히 각인 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들의 비(非)정착성 때문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처녀들의 총각선택기준은 또 다른 변화를 보였다. 이번에는 ‘사람구실 할 수 있는’ 제대군인도 기술자도 아니었다. 돈 있는 사람, 돈벌이 할 수 있는 총각이면 무조건 오케이였다. 입당이요, 제대군인이요 하는 너울들은 뒷발로 이미 차버린 뒤였다. 남편감으로서 제대군인의 이미지가 실추해 버린 지는 한참 되었지만, 그전까지 이상적 남편감 계열에서 뒷전에 밀렸던 인민군 군관총각들은 ‘생활상 편의를 위한 남편 감’으로 톱스타 계열에 껑충 뛰어 올랐다. 배급공급이 중단된 상태에서 군관들은 배급을 꼬박꼬박 다 준다는 것이 그 절박한 이유였다.

“남편 칭찬하는 여자는 행운아든가 아니면 바보 든 가, 둘 중 하나야.”
1990년대 중반기에 결혼여성들이 입에 올리기 시작한 이 말은 지금까지 여성들 속에 암암리에 작용해 오던 ‘성공적인 결혼’ 신화의 총체적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남편을 구름에서 떨어진 특정한 인간이 아니고 생활 속에 함께 자란, 자신처럼 결함도 약점도 지닌 경우 내지 자기보다 사고력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을 수 있는 ‘본능 그대로의 남자’를 보아내기 시작한 것 이었다.

북의 탁아, 유치원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

남측에서 임수경이 전대협 대표로 참가했던 1989년 7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 평양축전 때 있은 일이었다. ‘백두-한라 대행진대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연단에 그녀가 올랐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이 이러했다. “엄마! 아빠! 전 평양의 하늘아래 있어요! 여긴 지금 비가 내려요.” 서울의 하늘을 향하여 철부지마냥 울먹울먹해 외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아, 북한사람들은 저 인간적인 목소리와 얼마나 등지고 살아왔었나’ 하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13년간 투병의 삶을 살다가 유명을 달리한 나의 어머니, 계모를 맞으면서 첨예화된 나와 아버지와의 해결 불가능했던 갈등, 전대미문의 식량난으로 생활의 균형을 잃은 둘째, 셋째오빠의 가족친지들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심. 나에게 있어서 가족은 나의 발전을 가로막는 화근덩어리 외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 누군가 “나는 할 수 만 있다면 가족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싶다.”라고 한 말은 당시의 나에게 가장 적중한 듯 했다. 친구는 선택이 가능하지만 가족은 나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 인연이 아니라는 점은 나의 반(反)가족주의 관념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식량난이라는 대 위기를 맞으며 북한은 가정의 총체적 파산이라는 극단적 현실에 직면하였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때려 내쫓고, 시어머니가 금방 해산한 며느리 등에 아기를 업혀 천리밖에 장사 내보내고, 김일성대 김책공대 출신 자녀 7남매나 둔 노인이 거처할 데 없어 이 자식 저 자식의 집을 방랑하다 객사하고, 몸 팔아서라도 집 식구들에게 죽이라도 끓여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아들이 엄마를 때려죽이고, 그런 오빠를 누이동생이 칼로 찔러 죽이고…. 이것이 내가 떠나기 직전까지 북한이 처해있던 혈육애의 현 주소였다.

한국에 와서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나와 북한인들 속에 침식되어 있던 반가족주의 원인이 무엇이여 어디서부터 그 단추가 잘못 꿰어졌는가를 곰곰이 따져볼 기회가 있었다. 물론 이유는 여기저기서 나타났지만 가장 근본적 단서는 북한의 대외선전용 1호인 탁아, 유치원제도에 있었다. 아침마다 안 떨어지겠다고 울음과 발버둥질로 항거하는 어린것을 놀이시설도 별로 없는 감옥 같은 유치원, 탁아소에 냉정하게 떼어 맡기고 엄마(간혹 아빠)들이 자기 일터로 종종 걸음 칠 때 그 걸음걸음이 부모자식간의 살인적 반목을 미리부터 예고하고 있었다. 북한은 탁아, 유치원제도를 내올 때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가져올 정서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법들도 또한 연구되었어야 하였다. 물론 부모가 자식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나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짧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현재의 탁아, 유치원 제도가 불러오는 가족적 유대의 결핍을 보완하는 제도도 동시에 연구 도입되었어야 하였다.

최진이 / 前 조선작가동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