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 혁명가들에 대한 슬픈 기록 ‘진보의 그늘’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국회의원 후보 사퇴 문제로 촉발된 당내 배후 논쟁은 초반에 경기동부연합의 실재 여부에 모아졌다. 민노당 시절부터 당권을 장악해온 실체가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공당의 배후에 주사파 조직이 있는 것 아니냐며 파장이 확산됐다. 민노당에서 경기동부연합의 존재는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진보의 그늘-남한의 지하혁명조직과 북한’.

경기동부연합 논란이 촉발되자 한기홍 하태경 등 전향한 ‘486 NL 출신 운동가’들이 나서 통합진보당 주류의 배후는 경기동부연합이 아닌 구(舊)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재건파들을 정조준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2번과 이의엽 선대본부장이 몸통으로 떠올랐다. 현재 당권파들 가운데 경기동부연합은 우위영 대변인이 거의 유일하며 당내 주류파인 영남과 경기동부, 전남을 연결할 조직적 맥은 구 민혁당 계열만이 구축할 수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가 통합진보당 내부 당권파의 배후에 민혁당 재건파 출신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3월 하순에 출판한 ‘진보의 그늘-남한의 지하혁명 조직과 북한’을 출간했기 때문이었다. 


민노당 배후 논란 이전 한 대표는 ‘진보의 그늘’ 서문에서 “지하당 출신 가운데 자신의 이념과 국가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투명하게 밝히지 않고 공직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우리 정치가 종북의 강력한 파장 아래로 들어가고 있는 이상 ‘종북’의 정점에 있었던 지하혁명 조직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한 대표는 ‘진보의 그늘’ 출간 동기로 지난해 발생한 왕재산 간첩단 사건과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들었다. 북한의 대남 지하당에 연루돼 사법적 심판을 받았던 인사들이 공당에 들어가서도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해서 북한의 논리를 옹호한다면 국민들은 국가 정체성 문제에 심각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는 색깔론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과연 이들의 종북DNA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진보의 그늘은 민혁당뿐만 아니라 1970년대 이후 국내 종북 지하당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 저자는 본문에서 지하당에 대한 주관적 기술을 자제하면서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그 실체를 규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공안기관의 수사기록이나 판결문, 관련자들의 일방적 진술만으로는 지하당의 본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북한이 민주화 돼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 비어 있는 퍼즐의 상당부분을 꿰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혁멱당(통혁당) 사건은 그 실체에 관한 논란이 거의 없다. 김종태 등 구(舊) 좌익인사들이 북한과 연계를 맺어 활동하는 과정, 검거와 재판, 북한의 이후 활동을 기술했다. 저자는 여기서 통혁당 2인자로 사형이 집행된 김질락을 통해 1960년대 북한을 추종한 엘리트의 회환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인민혁명당(인혁당) 및 재건위원회 사건에서는 과거 수사기관의 무리한 강압수사와 처벌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도 조직이 실재했음을 보여주는 원로 인사들의 간접 체험을 소개했다. 근래 들어 법원은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인혁당 관련 재심에서 관련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조직의 실체 자체가 부정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인혁당과 재건 조직의 성격과 규모 등 그 실체를 부분적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남한민족민주전선(남민전) 사건은 창당부터 중앙위원 체포 시기까지 긴박한 스토리 전개가 특징이다. 남민전은 북한과 직접 연결을 시도하며 공작금까지 요구했지만 실제 활동은 독자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남민전 중앙위 위원들은 남로당부터 이어지는 구 좌익의 마지막 세대들과 1970년대 운동가들이 함께 망라돼 있다. 이들 가운데 현재 우리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인사도 적지 않다. 이들의 과거 활동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혁명가의 사상이 어떻게 풍화 또는 진화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발생한 구국전위와 민혁당 사건을 통해 1980년대 자생 주사파들이 북한과 연계해 활동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총책 김영환이 김일성 만난 일화와 그 만남을 계기로 역설적으로 사상적 방황을 하게된 과정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하영옥, 이석기 등이 김영환의 해체 선언을 무시하고 당을 재건하기 위해 활동한 사실도 드러난다. 


중부지역당 사건은 남파간첩이 직접 포섭해 조직한 지하당 중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이선실은 민중당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김낙중, 손병선, 황인오를 포섭해 이들을 중심으로 3개의 간첩망을 운영하면서 400여 명의 조직원을 모아 중부지역당을 결성했다. 이 책에서는 중부지역당 수사 직전 북한으로 도피한 이선실(남파간첩 중 최고위층)의 실체를 규명하는 과정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아사 사태가 발생하고 탈북자가 제3국을 유랑하는 삶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김일성, 김정일에 충성을 맹세하며 북한 중심의 혁명을 꿈꾸는 일심회 조직원들의 일탈도 드러난다. 일심회 사건은 1980년대 주사파들이 2000년대 들어서도 북한에 대한 미망을 접지 못하고 남한 혁명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책의 출간과 함께 통합진보당 주류의 전력 문제에 대한 논란이 더 커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파장과 달리 이 책을 통해 남한에서 지하혁명당의 출현과 사멸의 과정을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북 혁명가들의 슬픈 인생사에 마음이 ‘훵해’지기도 한다. ‘진보의 그늘’은 지난한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인 지하당의 역사이자 대한민국 현실 정치에 필요한 사상적 면역제로 평가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