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프리즘] ‘南 배반’ 동일한 선택 최덕신 일가

류미영 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아들 최인국씨가 지난 7일 평양에 도착해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최 씨는 영주 목적으로 월북했다. / 사진=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 캡처

얼마 전 북한에 영구 거주하겠다며 평양으로 간 최인국의 부모는 월북한 남한 인사 가운데 최고위급에 오른 전 한국 외무부 장관 최덕신·류미영 부부다. 최덕신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최인국은 차남이다. 최덕신의 부 최동오는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을 지냈다. 모친 류미영 전 북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은 임시정부 시절 참모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유동열의 수양딸이다. 유동열은 광복군 참모총장으로 활동했다. 1세대인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는 1903년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천도교 간부과정과 법정과를 졸업한 후 강도사로 임명되어 평안북도 의주대교구에서 활동하였다.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귀국하였다. 6·25전쟁 때 입북하였고, 1963년 9월 16일 사망하였다.

김일성은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동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1926년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만주무송에서 사망 후 오갈 데가 없어 14세 때 아버지 친구들의 권유로 최동오가 운영하는 만주 화성 의숙으로 가서 중학교 과정 학업을 1년 정도 계속하였다고 말이다. 당시 최동오는 김일성의 학업을 지원하였고, 여기서 ‘ㅌㄷ 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하였다고 한다. 최동오는 6.25 당시 북으로 넘어가 북한에서 장관급 대우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과 최동오는 30년 후 북한에서 북한 수상과 재북 평화 통일 촉진협의회 간부로 재회하였다. 여기서 최동오는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을 받았다. 북한 정권 밑에서 벼슬까지 한 인물에 훈장을 서훈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세대인 최동오 아들 최덕신은 1945년 해방 후 한국에서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제3사단장, 제1군단장을 거쳐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과 함께 귀국해 한미 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엔 11사단장을 맡아 경남 일대에서 후방 안정화 작업을 맡게 됐는데 이때 수백 명의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연루자로 지탄을 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 그해 10월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1963년부터 4년간 서독주재 대사를 지냈다. 최덕신은 외무장관과 천도교 교령을 지냈지만 천도교 교령 재선에서 박정희 정부의 지원이 미흡한 데 불만을 품고 해외로 이주, 아내 류미영과 함께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1986년 독일에서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

입북 전 민주화운동을 가장한 반정부 활동을 하다 북한으로 넘어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1989년 숨졌다. 최덕신은 북한으로 영주하기 전 74년 주서독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육영수 여사 빈소에 찾아가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처 류미영은 남편 사망 후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2000년 8월에는 북한 이산가족 방문단 북측 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류미영은 한국에 있던 차남 최인국과 막내딸 최순애 씨를 만나기도 했다. 최덕신·류미영 부부의 장남 최건국은 독일에 거주하다 숨졌으며 세 딸은 현재 외국에 살고 있고 한국에는 최인국만 일정한 직업 없이 살다가 7월 초 월북한 것이다.

최건국은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출신이다. 이건희, 홍사덕과 고교 동기다. 서울에서 군대(공군) 제대 후인 1963년 9월부터 독일에 거주해 왔다. 아버지 최덕신이 서독대사로 발령받으면서부터다. 1970년대 중반 삼성전자의 프랑크푸르트 주재원이 되었다가 사직했다. 최건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유학생 출신 인사들과 교류하며 서독 교민을 규합, 한국 민주화운동을 빌미로 반한 활동에 뛰어들었다.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에 적을 두고 좌파 활동을 했다. 윤이상과 정규명, 송두율, 이종현 전 민건 의장 등 친북 인물이 주요 멤버였다.

2007년 당시 최건국은 오스트리아 빈에 본부를 둔 한민족통일연구회의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북한도 자주 왕래하면서 남북 경제협력 기업인 한백상사 대표로 남북합동 자원개발사업을 목표로 사업을 했으며 북한이 한백상사에 관광 광고 사업 운영권을 넘기면서 북한을 자주 왕래했다.

최건국은 20여 년 이상 대북 사업을 해왔으나 북한의 대금 미결제 같은 약속 불이행 등으로 인해 매년 적자에 허덕이다 문을 닫았다. 조부 최동오, 부모인 최덕신 부부, 수양 외숙부, 이모 등 다섯 명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류미영의 이모 류영준도 항일단체 근우회를 조직했으며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최 씨 일가는 자신들이 남북한 가장자리에서 민족이나 통일을 위해 일한 독립운동 집안이라고 자찬할 수 있으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기회주의자들로 자신들이 유리한 국면에 따라 남북을 오가면서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비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잘나가다 뜻대로 되지 않자 끝내 배반했다는 지적도 끝까지 따라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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